'쌀'에 기반한 사회 분석 - <쌀, 재난, 국가>, 이철승
이제부터 나는 쌀로, 더 정확히는 쌀을 재배하는 문화와 시스템으로 많은 것을 설명할 것이다. 바로 '쌀 이론'의 수립이다.
설명 목록은 위계 구조와 불평등, 불평등에 대한 인식, 급속한 경제 발 전, 협력과 경쟁의 공존, 행복과 질시, 교육열과 사회이동, 노동시장 구조, 성차별, 연공 문화의 존속 그리고 소통의 문화까지 포괄한다.
부족의 지도자 계급은 저수지 공사에, 둑을 쌓기 위해 혹은 물길을 끌어오기 위한 수로 공사에 자기 부족을 포함해 인근 다른 부족의 노동력을 대규모로 동원, 투입할 수 있어야 했다. 이 '협업'을 어떻게 조직하고 동원할 수 있는지에 따라 부족의 생존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쌀 문화권의 집단주의는 씨족이나 이웃과 함께 생산 스케줄을 짜서 협업을 통해 노동력을 동원-조직한다. 논밭 갈기, 파종, 모내기, 김매기, 수확의 일정은 마을 단위로 조율되며, 농사의 기술과 기법은 협업을 통해 공유, 확산되고 더 나은 방법으로 개량된다.
이 벼농사 체제의 '공동생산 네트워크'로부터 유래하는 '네트워크 경쟁'의 사회심리학적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는 경로 의존성으로 인한 경쟁 문화의 무한 반복과 강화다. 둘째는 상호 의존 및 경쟁과 함께 강화되는 '질시의 심리학'이다. 셋째는 상호 의존과 경쟁이 출구 없이 되풀이되며 만들어지는 '신뢰와 불신의 이중적 공존'이다.
동아시아 벼농사 체제는 서로 모순적인, 공동생산-개별 소유 시스템으로 인해 그 내부에 평등화와 차별화의 욕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밀 문화권의 개인주의의 경우 가구 단이나 마을 단위 협업이 아닌 개별-가구별로 생산 단위가 꾸려지고, 따라서 생산물에 대한 소유 또한 철저히 개별 가구 단위로 이루어진다.
더 많이 생산하고 싶은 자는 더 많이 뿌리고 더 많이 키워서 더 많이 거두면 된다. 각자 뿌린 대로 거두는 보상 체계 는 인간의 노동에 비례해서 자연(신)의 수혜를 배분하는 시스템이다.
연공 문화 또한 벼농사에서 유래했다. 경험 많고 나이든 농부에게 중요한 의사 결정을 맡기는 벼 농사 체제의 위계 구조가 현대 기업 조직의 연공 문화와 임금제도로 정착한 것이다.
연공 문화는 새로운 세대와 충돌하기 마련이다. 이들은 단기적으로는 연공서열 문화가 강제하는 위계에 침묵하는 법을 배우지만,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민주적 대인 관계의 가치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에게 연공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회계약이다.
청년들은 한 조직에 뼈를 묻으리라 가정하지 않으며, 입사와 함께 짜인 인간관계를 '출구 없는 전근대 마을 공동체'라고 인식하지도 않는다. 평생고용 모델을 기반으로 구축된 연공제의 '지연된 보상' 원리는, 따라서 이들에게 '오래 된 미래'가 아니라 '도래하지 않을 미래'다.
상층 대기업 위주 임금 상승 투쟁을 통한 급격한 임금 인상은 하청업체와 비정규직의 임금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임시직이나 무기 계약직과 같이 연공급 계약 의무가 없는 (사실상의) 비정규직을 증대시키고, 자회사 설립과 사내 하청을 통해 연공급 임금 테이블의 초봉과 기울기를 차별화했다.
이와 함께 원청 정규직 노조원들은 단체협상을 벌여 핵심적이고 사대적으로 안전한 업무를 도맡았고, 사내 하청과 외주를 써서 위험 업무는 비노조 비정 규직에게 전가시켰다. 또한 하청 업체 단가 후려치기로 납품가를 억제함으로써 정규직 연공급의 임금상승분에 따른 비용 상승을 상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