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터러시 인사이트 제1화
1784년,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이렇게 외칩니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
칸트의 계몽철학을 대표하는 표어입니다. 직역하면 ‘자신의 이성과 판단을 통해 스스로 배우고 생각하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리터러시의 개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일단 칸트를 살펴보기 전에 리터러시를 설명하기 위해 아주 먼 과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읽고 쓰기 능력이라는 리터러시의 역사적 기원은 선사시대의 ‘동굴벽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 시대는 상상이나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했었습니다. 당시 그림은 어떤 대상의 묘사, 예술적인 행위, 사냥 소망 등 다양한 목적으로 그려졌는데, 이 그림을 읽고 해석하는 능력을 리터러시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이후 고대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등에서 고유한 문자가 발명되었고, 문자사용은 권력 계층과 종교 지도자들 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일반 대중은 문자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권력층은 문자를 배우고 활용하는 행위가 지배력을 유지하는데 필수라고 보았으며, 사람들의 접근을 제한하려 했습니다. 문자해독, 즉 리터러시 능력이 대중의 비판적 사고를 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세를 지나 15세기에는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인쇄술을 발명한 덕분에 책이 대량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의 책은 양피지에 글과 그림을 새겨넣는 예술품으로 권력을 가진 소수만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인쇄술은 지식과 정보의 대중화를 이끌었고, 이어진 르네상스 운동과 종교개혁은 일반 대중의 교육기회를 넓혔습니다. 그럼에도 리터러시 능력은 상류계층과 엘리트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18세기에는 프랑스를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 계몽주의가 퍼지게 되었습니다. 계몽(啓蒙, Enlightenment)이란 단어는 말 그대로 ‘어두운 것을 열어 밝힌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모르는 것과 잘못된 생각에서 진실을 밝힌다는 것입니다.
계몽주의는 왕권과 종교의 권위주의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믿음을 의심하고, 이성과 과학에 기반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인류의 진보를 이끌고자 했습니다. 이전까지 엘리트 중심이었던 지식이 대중에게 확산되였고,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사유가 넓게 퍼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몽주의 철학을 이끄는 인물 중 하나로 칸트가 등장했습니다.
칸트의 사유는 리터러시의 개념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철학적 배경을 제시합니다. 이에 그의 계몽 사유가 집약된 에세이인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하 계몽)과 <사유 안에서 방향 정하기란 무엇인가?>(이하 사유)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성숙을 위한 '네 가지 리터러시 구성'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이 과정에서 “과감히 알려고 하라!”라는 칸트의 계몽정신을 중심에 두고 리터러시의 현재 의미를 조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첫째는 ‘스스로 비판적으로 사고하기’입니다.
칸트는 <계몽>에서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Unmündigkeit)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이다.”
여기서 '미성년'은 미성숙한 상태를 말하고, ‘미성년 상태를 벗어난다’는 말의 의미는 타인의 권위와 관습, 사회의 편견에 기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스스로 생각하고 그 판단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내용은 비판적 리터러시와 연계됩니다. 우리는 권위 있는 언론사의 기사 또는 인플루언서가 제시한 SNS의 정보가 항상 옳다고 믿지 않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 주장과 근거를 검토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양한 관점을 통해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는 ‘자율적인 자기 방향 설정하기’입니다.
<사유>에서 칸트는 “자율적인 자기 방향 설정(self-orienting)”을 말하며, 자기 방향 설정을 “논리적 지침으로 작용한다”라고 주장합니다.
이 말은 스스로 생각과 행동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단순히 자유롭게 생각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사고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에 따라 무심하게 숏폼(short-form) 영상을 보기도 합니다. 여기서 왜 이러한 영상이 추천되는지 의도를 파악하고, 나에게 필요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도덕적 원칙 따르기’입니다.
칸트는 <사유>를 통해 “도덕 규범은 순수 이성의 실천적 사용에서 비롯된다”라고 말합니다.
칸트는 우리 행동이 개인적 감정과 상황에 좌우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도덕적 원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도덕적 원칙은 개인의 감정, 경험, 본능이 아닌 ‘논리적이고 보편적인 이성’에 기반합니다. 칸트는 이를 '순수 이성'이라고 표현합니다.
현재 ‘디지털 리터러시’의 중요성이 지속해 커지고 있습니다. 개인의 생각과 행동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여기서 칸트의 ‘도덕적 원칙 따르기’는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가령 사이버범죄 발생, AI 윤리같이 나의 행위가 공동체와 넓게는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이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인지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은 ‘사회적으로 소통과 협력하기’입니다.
칸트의 <계몽>과 <사유>는 모두 ‘이성의 공적 사용이 사회와 인류의 계몽에 기여할 수 있다’라고 밝히며, ‘자유롭게 사람들 사이에 열린 소통’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칸트는 사회를 계몽하기 위해 공적으로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나 혼자가 아닌, 모두를 위한 것이 계몽의 길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칸트의 사유는 현재의 리터러시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 및 분석, 정보 활용 능력을 바탕으로 공적 담론(이야기)에 참여하고 집단지성을 통해 공동체 발전에 함께할 수 있습니다.
칸트는 대부분 사람이 평생 미성년 상태에 머무르는 이유는 “게으름과 비겁함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리터러시 역량은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일정 부분의 노력과 관심, 칸트가 말하는 도덕적 원칙이 함께해야 합니다.
물론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칸트의 사유가 현재에 모두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 경험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앞서 밝힌 네 가지 리터러시에 대한 고찰은 지금 사회에서도 통용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칸트의 통찰로 우리는 ‘미성년 상태’를 벗어나고, 나아가 개인과 사회의 성숙을 이끌 수 있는 도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칸트의 철학을 바탕으로 우리는 어떻게 리터러시를 실천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본 칼럼을 함축하는 칸트의 주장을 인용하며 글을 마칩니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참고문헌
- 정제기 (2024). 탈진실 시대의 비판철학의 요청: 칸트의 계몽주의 정신과 희망철학을 중심으로. 철학논총, 117권 3호, 207-242.
- 조명래 (2022). 사회과학의 등장배경으로서 계몽주의의 재조명. 공간과 사회, 18권, 161-179.
- 함태원·양대종 (2024). 칸트의 계몽과 스스로 사고하기: 스스로 사고하기의 두 의미를 중심으로. 인문학연구, 63권 2쪽, 99-124.
- Ferrer, D. F., & Kant, I. (1996). What Does it Mean to Orient Oneself in Thinking?.
- Kant, I. (1784, December). Beantwortung der Frage:
- Was ist Aufklärung?. 임홍배(역) (2020). 계몽이란 무엇인가(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변). 서울: 길.
*이 글은 '디지털포용뉴스'에 기고한 칼럼을 수정하였습니다.
칼럼 URL: https://www.dginclusion.com/news/articleView.html?idxno=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