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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Nov 02. 2024

열네 번째 일기

놀라운 사실이다


열네 번째 일기


놀라운 사실이다. 유서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간다니 말이다. 의식하지 못한 시간의 흐름은 이토록 부지불식간에 증발하고 만다. 사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시간'은 실존하지 않는 개념이라는 글을 보았다. 하루를 이십사 시간으로 정의한 것처럼 그저 지구에서 생존하는 인간들의 편의로 만들었을 뿐이라고. 이론인지 주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서른 개의 일기 중 거의 절반을 썼다. 무려 일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아직 죽음을 결심한 해까지는 오 년이 남았는데, 남은 일기는 고작 열다섯 개다. 아니면 무려 열다섯 개가 될 수도 있겠다. 서른 개의 일기를 모두 완성한다면 더는 같잖은 글을 쓰지 않을 생각이다.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을 생각이다. 짧은 문장을 끄적이는 일조차 최대한 자제 생각이다. 그러니까 만약 서른이 되기 전에 이 글을 전부 쓴다면 더는 나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죽기 직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 누구도 나의 죽음이니 유언장이니 따위는 전혀 알고 싶지 않을 테지만, 기록이 남지 않은 것과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은 아주 큰 차이다. 우주처럼 몇 광년의 거대한 간극이 존재할지도 모르는 일.


뜬금없는 말이지만, 나는 간극이라는 단어를 상당히 좋아한다. 사이, 차이, 격차, 틈, 거리 따위의 말로도 대체할 수 있겠지만 그런 단어들로 모든 표현을 나타낼 수 있다면 구태여 이런 말이 태어나지 않았으리라 간극이라고 하면 영영 좁혀지지 않을 의도로 무수히 먼 거리를 평행하는 두 존재가 떠오른다. 완전히 등을 돌리고 걸어가며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이 떠오른다. 뒤를 돌아보면 사이나 차이나 격차나 틈이나 거리였던 것이 간극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다. 돌이킬 수 없고,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간극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아주 멀고 먼 간극. 우주의 별만큼 멀다. 감각도 마음도 상상도 마모되지 않았던 나, 비바람에 깎여 사방이 뭉툭하게 닳아버린 나는 과연 같은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그것이 나였다고 말할 수 없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드는 탓이다. 과거의 나도 마찬가지였겠지.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목격한다면 저 사람이 바로 미래의 나라는 말을 당당하게 내뱉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를 보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없고,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러면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타임 패러독스가 생긴다. 무엇도 내가 아니라면, 과연 나는 언제부터 나로서 존재하는 것일까.


인류 역사에 저마다 큰 획을 그은 철학자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철학자인 동시에 경제학자, 수학자, 화가, 조각가, 건축가, 과학자, 공학자, 문학자 등이었다. 다방면으로 역사에 남을 만큼 천재적이었다. 그러니 그들도 분명 이 가엾고 가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나'의 정체나 행방을 찾는 방법을 명확하게 정리한 철학자는 찾지 못했다. 수학은 한 치의 오류도 용납하지 않는 공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어째서 철학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모두의 답은 모두의 삶에 존재한다는 두루뭉술한 말만 남긴 것인가. 수백 년 전 세상을 떠난 그들이 원망스럽다. 근원을 따지면 수학과 철학은 본래 같은 학문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철학을 수학의 일종이라고 봐야 할까, 수학을 철학에서 파생된 학문으로 봐야 할까. 그건 알 바가 아니다. 철학도 분명 수학처럼 분명한 답이 존재할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이건 확실해야만 하는 문제다.


그러니 인류의 한계를 넘어선 위대한 천재들은 어서 나처럼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사람들에게 현명하고 유쾌한 정답을 주어야 한다. 과거의 나도 지금의 나도 미래의 나도 내가 아니라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나 자신을 나라고 인정할 수 없다면, 진실된 나는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빨리 알려줘야만 한다. 간절한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기도하다가 결국 이런 행위도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도로 손을 내렸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데 내가 간절하다고 무작정 기도하는 행위는 너무 이기적이다. 본래 이기적인 사람인 건 맞지만 그 정도로 이기적이고 싶지는 않다.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이유를 들자면 나는 어차피 서른에 죽는다. 삶을 놓고 세상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진정한 나 자신을 찾아 떠나는 성찰 따위는 할 수 없다. 독수리에게 잡혀가는 불우한 운명의 참새도 허공에서 나를 비웃을 일이다.


스물다섯은 젊은 나이다. 아주 젊은 나이. 하지만 젊어서 여유로운 사람은 없다. 젊으니까 여유롭게 살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젊었을 때 젊음을 바쳐 일해서 돈을 모으고 경력을 쌓고 발전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말하는데 과연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싶다. 몸과 마음이 늙어 더는 젊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룩하지 못한 것들을 지금의 젊은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듯하다. 나는 신세대이기에 그런 기성세대를 향한 불만이 크다. 젊음을 바쳐 고생한 끝에 망가지고 부서지고 조각난 시간 너머에서 기다리는 존재는 무엇이던가. 사랑하는 사람과 꾸린 가정이나 든든한 노후자산을 비롯한 찬란한 미래는 애초에 선택지에도 없다. 허름한 통장, 사라진 시간, 억압된 자유, 후회와 한탄, 술과 담배, 스트레스, 무너진 건강, 잃어버리고 포기하고 지나친 꿈……. 너무 극단적으로 비참한 결론만 내놓은 기분이다. 그러나 이것을 비굴하고 참담하다고 말한다면 우리나라에 비굴하고 참담하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으므로 이 또한 함부로 결단하지는 않겠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세상인가 싶은 것이다. 부모를 위한 세상도, 자식을 위한 세상도 아니다. 부부를 위한 세상도, 독신을 위한 세상도 아니다. 아이를 위한 세상도, 청년을 위한 세상도, 노인을 위한 세상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아무래도 강자를 위한 세상이다. 약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모두 구석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배척, 소외, 조롱, 차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장애인보다 비장애인, 여자보다 남자, 흑인과 황인보다 백인, 성소수자보다 성다수자가 우선시되는 세상인 것이다! 이렇게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세상이라니.


한 명의 부자는 천 명의 평민을 죽이고 살아남을 것이다. 또는 그런 과정을 거치며 살아남았다. 돈과 권력을 쥔 자만이 호의호식하기에 다들 돈과 권력을 손에 쥐려고 안간힘을 쓰는가 보다. 그러다가 낙오된 자들은 패배자가 되어 영원히 밟히면서 살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가 있고, 위로 올라간 극소수의 인간들은 번식을 통해 자식을 낳아 대대손손 그 부와 권력을 세습하는 것이다. 사회란 이렇게 무서운 존재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것을 학교 다닐 때는 아무렇지 않게 배웠다. 독재자의 압력에 짓눌려 터져 죽은 이들의 피와 뼈와 내장을 아무렇지 않게 보고 배우며 성장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런 것들을 학습하며 이런 어른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돈과 권력만 없는 게 아니다.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마음도 없어졌다. 사랑을 내버린 일은 나름대로 현명했다. 나처럼 아무것도 없이 자라날 인간이, 돈과 권력 대신 상실감과 결핍과 허무주의를 물려받은 인간이 한 명 더 생긴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끔찍한 마음이 솟구친다. 찐득하게 내장에 들러붙는 기분이다. 그러니 홀로 태어난 나는 혼자 죽을 것이다. 아직 시간은 오 년이나 남았다. 남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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