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째서 사과나무로 태어나지 못했을까. 사과나무는 나보다 훨씬 더 크게 자랄 수 있고, 열매는 앵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탐스럽다. 조그마한 앵두가 우수수 피어나는 가느다란 가지가 얼마나 볼품없는가! 다음 생에는 다시 사과나무로 태어나 사과 열매에 이슬을 떨어뜨리리라 다짐한다.
그런데 앵두가 사과보다 못난 건 뭔가. 사과처럼 크지 못하고 사과처럼 단단하지 못하고 사과처럼 많은 과즙을 품지 못한 것이 못난 점인가. 어째서 그 기준을 앵두나무인 내가 스스로 정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작은 앵두나무로 태어나 나의 줄기와 가지와 나뭇잎과 열매를 서걱서걱 자르고 있었구나. 땅 속 깊이 자리 잡아 내린 무성한 뿌리와 나의 앵두에게 고해성사를 한다.
불행해지는 건 쉽다. 나와 남을 비교하면 그 순간부터 불행해진다. 저 사람은 초등학생 때 성장이 멈춰버린 나보다 키가 크다. 피부도 좋고 외모도 당연히 낫다. 쥐꼬리 월급쟁이인 나보다 돈을 많이 버는 건 기본이다. 일처리도 척척 잘하는 것이 참 부럽다. 성격도 싹싹해서 사람들도 좋아한다지. 나도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닌데, 어째서 나는 저 사람처럼 될 수가 없다는 걸까.
비교하는 건 간단하다. 내가 스스로 톱을 쥐고 나의 줄기와 가지와 나뭇잎과 열매를 열심히 긁어내면 된다. 하지만 비교하는 건 동시에 무척 피곤한 일이다. 이미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토막 내고 이곳저곳을 욕하고 까내리는 사람이 넘쳐나는데, 구태여 나까지 나의 소중한 앵두나무를 짓밟을 필요가 없다.
꺾인 가지와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나뭇잎을 정리하고 흙을 토닥토닥 덮어 드러난 뿌리를 무사히 덮어주었다. 몇 달 내내 기다려 고작 두어 개 열린 열매는 생각만큼 맛있지도 않았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데, 나는 인내만 쓰고 열매는 떫은 나무가 되었나 보다. 그냥 사과나무로 태어날 걸 그랬나. 얼마나 맛있으면 순식간에 모여든 벌레들로 인해 익지도 않은 열매에 듬성듬성 구멍이 뚫릴까.
그래도 나는 이미 앵두나무니까 그걸로 됐다. 내가 초라하고 작은 앵두나무라는 건 별로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 앵두나무로 태어날까. 사과나무도 포도나무도 민들레도 풀꽃도 소나무도 다들 태어났으니 그렇게 살겠지. 내가 사과나무가 될 수 없는 대신 사과나무도 앵두나무가 될 수 없을 테니. 되고 싶지도 않으려나? 아무렴 상관없다. 아니지. 초라하고 작은 앵두 열매라도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달콤함이 아니던가.
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건 역시나 어려운 일이다. 방법도 목적도 모르는 여행길처럼 내내 불안하기만 하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앵두나무로 태어났고, 앵두나무도 땅과 흙과 바람과 하늘과 햇빛을 누리며 자라날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