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야사 Feb 02. 2022

어설픈 감성인이 열심히 먹어치우는 글

삭막한 세상에서 태어난 나는 감성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나는 감성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감성(感性)이란 무엇인가.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 사전적인 의미는 심심하고 딱딱한 문장으로 다가온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것이든 나만의 정의를 만들어내는 게 편해졌다. 감성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내가 받아들이는 감성은 아마 무언가에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태어나길 이렇게 타고났다. 머리는 현실적인 실용주의를 추구하는데 심장은 낭만주의에 종속되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누구보다 어스름한 새벽을 사랑할 정도로 감성적이지만, 빨리 잠을 자야 하기에 정작 새벽 감성은 누려본 적이 없다. 감성적이지만 감정적이지는 않고, 감정적이지 않다가도 이성적인 사람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저리 감정이 없을까 고개를 젓는다. 내 안에는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내가 참 많다는 걸 요즘에서야 조금씩 깨닫고 있다. 나만큼 위태롭고 어설픈 감성에 가랑비처럼 스며드는 안쓰러운 사람이 또 있으려나.


감성이란 참 어렵다. 갬성이라고도 하던가. 이 단어는 무분별한 양산형 감성을 조금 비꼬는 느낌이 스며든 것 같기도 하다. 나름 Z세대인데도 요즘 유행이나 문화에는 무관심하다. 그래도 SNS 없이 살 수 없는 현대 사회 구성원답게 인스타 감성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인스타 감성이 지나치게 쏟아지고 때로는 상업적으로 이용되기도 하면서, 감성 자체를 받아들이는 시선이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오늘 나아가지 못한 발걸음이 내일의 시작점이 되기를.]이라는 문장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누군가는 이 문장을 보고 공감할 수도 있고, '그래. 내일은 더 힘내자.'라고 생각하며 작은 위로를 받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내가 뭐 때문에 힘든 줄도 모르면서 뭘 안다고 저런 글을 쓰는 거야?'라며 짜증을 낼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직도 저렇게 뻔한 감성팔이 글로 관심 끄는 게 한심하다 말하며 혀를 차기도 할 것이다.


나는 감성적인 동시에 감정적이기까지 하다. 불쌍한 천성이다. 매일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 된다고 수십 번 되뇌지만 좀처럼 실천하지는 못하는 사람이라서. 같은 글이라도 어떤 날에는 심장에 옅은 파동이 일어난 것처럼 감동받지만, 어떤 날에는 뻔한 글이라 생각하며 그냥 눈을 돌려버리기도 하고, 마음이 삐뚤어진 날이면 과연 이 글을 진심으로 쓴 건 맞을까 괜한 의심까지 한다. 무언가에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은 그렇다. 내 마음과 내 상황에 따라 아름답고 따뜻한 것을 얼마나 누릴 수 있는지는 스스로 정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닌 듯하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감성을 사랑한다. 감성적인 글, 감성적인 드라마와 영화, 감성적인 음악 없이는 이 퍽퍽하게 메마른 세상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내가 냇물 속 돌멩이와 같은 감성을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 질 녘 노을과 맑은 하늘을 찍는 걸 좋아하고, 취향대로 흘러가는 독서를 즐기고, 인스타그램 계정에 글 올리기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심심한 시간에 몇 가지 쓸데없는 생각을 해 보았다.




Q. 요즘에는 그런 감성이 쉽게 관심을 끌 수 있으니까?

A. 아마도 아니다. 그런 이유였다면 인스타그램에 게시물을 올릴 때마다 반응을 얻지 못해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이 좋아요 몇 개를 받든 상관없다. 글과 사진을 지인에게 공유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주변인들이 보지 않기를 바란다. 따뜻한 관심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긴 하지만, 그다지 관심을 갈구하는 사람은 아니므로 기각.


Q. 사방이 막힌 듯한 삶에 위로가 되어주는 것 같아서?

A. 이건 좀 일리가 있다. 이제 갓 스무 살 타이틀 단 사람으로서 험난하고 힘겨운 삶이라 말하기도 조금 민망하지만 어린 사람도 인생은 험난하고 힘겹다. 상처를 쉽게 받고 문제에 적극적으로 부딪히기 어려운 성정을 가지고 있는지라 글과 음악으로 내면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마음을 치유하곤 한다. 요즘에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운동이나 달리기를 통한 스트레스 해소에 도전해 볼까 생각 중이지만.


Q. 딱히 이유는 없음. 세상 모든 일에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살고 있을까?

A. 흐리멍덩하지만 맞는 말이다. 나에게 태어난 이유는 없다. 태어남으로써 받은 삶에도 특별한 이유나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의 탄생과 존재가 무가치하다는 건 인정할 수 없어서 매번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내가 감성적인 사람으로 태어나고 자란 것에도 이렇다 할 이유는 없으리라.




몇 달 전에 인터넷에서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언제부턴가 낭만은 오글이 되었고 감성은 중2병이 되었다는 글. 생각해 보면 정말로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진짜 그렇게 되었다. 낭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현실을 모르는 바보가 된다. 나이가 어리면 멋모르는 사춘기 학생의 어설픈 허세가 되고, 나이가 어리지 않으면 나잇값 못하고 철없는 사람이 되었다. 근원지는 불분명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대한민국 사회는 쓸데없는 감성을 버리고 쓸데 있는 현실에 허덕이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런 세상에서 살다 보면 가끔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낭만 하나쯤은 숨기고 살지 않을까. 하다 못해 로봇도 감정을 배우는 세상인데. 시간이 축적될수록 쓸쓸해지는 삶에서 어떻게 감성과 낭만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영화와 연극을 보고, 그림과 사진을 감상하고, 노래와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여행을 떠나고, 꿈을 꾸고 사랑을 찾으면서 오롯이 내면의 울림에 집중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존재하지 않을까.


나는 좀처럼 마음이 뜨거워지지 못한다. 그만큼 불씨 같은 열정과 마음을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좋아하고, 그렇기에 조금 더 드러내고 싶다. 단지 그것뿐인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감 없이 이상을 좇는 어리석은 사람, 관심에 젖어 오글거리는 중2병 감성을 쏟아내는 한심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억울하고 서글픈 감정이 솟구치곤 한다. 하물며 오글거리면 어떻고 흔히 말하는 중2병이면 어떤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면,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오글거리는 중2병 환자가 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다른 사람의 비난은 신경 쓰지 말고 살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모든 사람이 비난과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니까.




무엇보다 슬픈 사실은 그것이다.

나 자신조차 나를 부끄럽다고 여기는 순간이 있다는 것.


하늘이 예뻐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괜히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걱정할 때가 있었다. 감성에 이끌려 글을 쓰다 보면 누군가로부터 새벽 감성 시인 납셨다는 말을 들을까 겁나기도 했다. 슬프게도 나의 감성을 부끄러워하는 이유마저 '남'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걸 깨달으니 마음이 참 아프더라.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감성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현실과 어설프게 타협하고 합리적이지 못한 성정을 타고난 '감성적인 사람'이었기에,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낭만 없이 어떻게 살지? 낭만 없이 무엇으로 버틸 수 있는 거지? 돈, 명예, 안정적인 인생, 가정의 평화. 그것이 진짜 어른을 지탱해주는 존재인가. 저들은 커다란 날개를 두 팔에 달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소망을 꿈꿨던 적이 없나. 바닷가에서 맨발로 파도를 맞으며 작은 게와 인사하고 모래성을 쌓는 장면을 상상한 적이 없나.


그런 무뚝뚝한 어른을 보면 다른 의미로 대단하다. 또한 두렵다. 서서히 나이를 먹고 사회에 찌들다 못해 완전히 녹아든 어른이 되면, 그때는 나도 낭만이고 감성이고 내던진 채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 같아서. 감성을 꿈꾸면 뭐하나 돈이 없는데. 낭만을 찾으면 뭐하나 실현할 수도 없는데.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게 생애주기의 과정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하면 겁이 난다.


다만 그런 것까지 모두 생각하며 전전긍긍 살기엔, 타고난 마음의 용량이 그리 넓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아도 평생이 부족할 만큼 인생은 짧다고들 하지 않은가. 청춘이란 어떠한 순간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마음에서 태어나고, 감정과 의지를 양분 삼아 자라고, 눈물과 함께 과실이 맺히는 모든 과정이 하나의 계절이고 밝거나 어둡거나 선명하거나 흐릿한 세상일 뿐이다. 지금의 나는 아직 위태롭고 어설프지만 평화로운 감성의 세상에서 머무를 것이다. 이미 머무르고 있으니 다짐할 필요도 없을까.




작년에 쓴 일기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2020년 9월 27일 일요일에 쓴 일기 이런 문장이 있는 게 아닌가. 역시 나는 감성을 타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이었나 생각하게 만든 문장.


나는 뜨뜻미지근한 감성인이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쩔 수 없이 한숨과 눈물이 나오는 날이라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