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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Feb 13. 2022

삐뚤어진 치아도 내 모습인걸

어쩔 수 없지


태어나고 만들어지는 모든 존재는 불가항력으로 부여받는 것이 있다. 외모, 천성, 성장 환경, 유전병 같은 것들. 지금은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사실 오랜 역사 속에서 인류가 완벽한 평등을 실천했던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이 세상은 '평등'과 '공평'이라는 개념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 모순된 세상일지도 모른다. 당장 10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역시 천부적인 신분으로 삶이 결정되는 사회가 전혀 이상한 사회가 아니었다. 사회는 평등을 향해 열심히 나아가고 있지만, 사람은 영원히 평등할 수 없다. 합리적이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지 못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탄생했나 싶을 만큼. 태어남과 동시에 삶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 외모지상주의나 자본주의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닌 것처럼.


나 같은 경우는 지극히 평범하다. 아니면 평범하긴 하지만 평균이라는 애매한 기준에서는 조금 낮은 위치에 있다. 평균보다 조금 더 가난하고, 평균보다 조금 더 삭막하고, 평균보다 조금 더 재능이 없는 사람. 사실 존재하지도 않는 기준을 억지로 만들어내서 나를 그곳에 끼워 맞추는 행위는 지나치게 피곤하다. 하지만 어쨌든 아예 나와 남을 비교하지 않는 건 아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잘난 점, 저 사람보다 못난 점을 굳이 찾아내서 생각하고 자책하고 은근한 우월감을 가지는 게 조금씩 습관이 되어가는 것 같아 큰일이다.


특히 외모는 수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나와 남을 비교하는 부분이다. 내면이나 환경적인 부분보다는 외면이 훨씬 돋보이니까. 유튜브나 SNS에서 연예인을 보고 있자면 나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수려한 외모와 빼어난 몸을 가진 사람이 넘쳐난다. 그러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나도 이렇게 생겼으면 좋겠다. 키도 크고, 팔다리도 길고, 얼굴도 작고, 살도 없고, 눈도 크고, 피부도 좋고, 이목구비도 뚜렷한 사람으로. 사회가 원하는 미(美)의 기준에 홀린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자꾸 사회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큰 키나, 긴 팔다리나, 작은 얼굴이나, 마른 몸이나, 큰 눈이나, 좋은 피부나, 뚜렷한 이목구비는 가지지 못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가끔 눈이 크다 속눈썹이 길다 피부가 좋은 편이다 칭찬 같은 걸 들어본 적은 있지만, 어쨌든 나보다 잘나고 화려한 사람이 넘치는 세상에서 사소한 만족을 찾기란 의외로 쉽지 않은 길이다. 만약 내가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잘생긴 사람이었다고 해도, 그때의 나는 여전히 내 외모를 누군가와 비교하며 나는 왜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한숨을 내쉬었을 게 뻔하지.


요즘은 현대 의학의 힘을 빌려 많은 관리와 시술과 성형으로 원하는 외모를 가꿀 수 있는 시대. 누구누구가 쌍꺼풀을 만들었네, 코를 세웠네, 눈트임을 했네, 턱을 깎았네 같은 남 이야기를 삼겹살 삼아 욕하고 씹고 물어뜯는 것도 이제는 무식한 일이다. 미인도 자연미인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자연주의가 씁쓸할 때도 있다.


나는 시기를 놓쳐 불행한 치아를 가졌다. 짧고 좁은 턱에 더 작은 잇몸을 열심히 뚫고 나오려던 치아는 결국 보기 좋게 바로 앞에서 뒤틀리고 말았다. 간단하게 사진으로 설명하자면, 왼쪽이 보통 사람의 치아라면 오른쪽이 나의 치아 상태다. 저 검은 부분은 썩은 게 아니라 입안이 보인다는 뜻이다. 그림 실력이 없어서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어금니와 송곳니에 밀려난 앞니와 아랫니가 부정교합으로 맞닿지 않아서 늘 앞니와 혀를 이용해 면을 끊어야 한다. 때문에 쉽게 잘리지 않는 냉면을 먹다가 면이 목에 걸려 죽을 뻔한 적도 있다. 어렸을 때 교정을 시켜주신다 했던 어머니는 어느덧 자식이 스무 살이 된 지금까지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다. 하기야 치아 교정에 들어가는 비용만 기본 300만 원 이상이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마스크를 써서 치아를 잘 보이지 않는 요즘 시국에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다.


가지런한 치열은 긍정적인 인상을 준다고 한다. 불규칙적인 치열과 맞닿지 않는 치아를 가진 나는 사회가 원하는 '긍정적인 인상'에서 탈락된 셈이다. 마음처럼 삐딱하게 삐뚤어진 치아. 그런데 지금까지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계시는 MC 유재석 씨도 치열은 그다지 고르지 않으시던데. 그렇게 생각하면 치열과 치아가 사람의 이미지를 결정한다는 것도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제 와서 교정을 하려니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무시무시한 비용. 그리고 귀찮음. 2년 6개월은 기본으로 잡아야 하는 긴 시간 동안 치아 교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통증과 불편함과 매주 치과에 들러야 하는 귀찮음. 그것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가지런한 치열을 가지고 싶냐 묻는다면, 솔직히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나와 똑같은 치아를 가지신 어머니 왈 "나이가 들수록 삐뚤어진 앞니가 점점 튀어나온다."라고 하신다.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한때는 단정하지 못한 치아와 치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굳이 교정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작은 키와 두툼한 턱살과 삐뚤어진 치아도 결국 내 모습이라서. 고칠 수 있다면 고치고 싶지만, 굳이 고치지 않아도 아직 사는 데 문제는 없다.―하지만 역시 키는 딱 6cm만 더 자라줬으면 좋겠다.― 나에게 못난 부분이 누군가에게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못난 것이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 있다. 예쁘지 않고 어리숙한 바보처럼 허허실실 웃는 사람이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잘 빛난다. 활짝 웃으면 못난 치아가 다 드러나지만, 그것보다 웃고 싶을 때 웃음을 참는 게 훨씬 괴롭다.


자존감이니 자기애니 뭐니 그런 건 잘 모른다. 별로 생각한 적도 없다. 다만 내가 나를 많이 사랑해줘야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건 안다. 어쩌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돈이랑 비슷하다. 돈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지만 행복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것처럼. 자존감이나 자기애가 행복의 길이 아닐 수 있지만, 행복하기 위해선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행복을 찾아 방황할 필요는 없어도 불행에 잠식되다가 외롭게 죽으려고 태어나진 않았으니,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많이 찾고 싶다. 적어도 내가 나를 미워하고 깎아내리는 것보단 훨씬 좋은 길을 찾을 수 있겠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가장 어렵다.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늘 생각한다. 허나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면 지금 당장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사실은 잊을 때가 많다. 힘들 때는 어떻게 스트레스를 푸는지, 기쁜 일이 생기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지, 산책을 할 때 어떤 노래를 듣는지, 훗날 시간이 지나서 가장 이루고 싶은 건 무엇인지 등등.


단순히 성격이나 취향을 생각하는 넘어서 나만의 '성장'을 제대로 고민할 필요는 있다고 여긴다. 자격증을 많이 따고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스펙부터 쌓는 게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성장일까? 크고 유명한 기업에 가서 높은 자리까지 오르는 걸 꿈꾸고 있나? 뚜렷하지 않은 미래를 위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면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쌓는 게 좋지 않을까? 어느 것 하나 틀린 계획은 없다. 지금 난 사회에 몸담은 직장인이지만 이런저런 기업을 전전하며 살고 싶은 건 결코 아니다. 유명한 대기업이든 지금 내가 다니는 회사든 결국 크게 다른 점은 없을 테니까. 오히려 더 나쁜 일상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고.


지금 내 모습을 열심히 좋아해 주고 싶다. 스펙을 쌓든 공부를 하든 내면을 넓히든, 내가 바라는 삶의 장면을 만들어가며 하나씩 이루어가고 싶다. 부족한 영어 실력과 게으른 욕심과 작은 키와 삐뚤어진 치아 모두, 어쨌든 지금의 내 모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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