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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Dec 29. 2022

불현듯

자작시


살아가는 것이 부끄러운 날이 있었다


그날은 처음으로 저금통에서 지폐를 도둑질했던 날이나

누군가를 속이는 거짓말을 처음 의도적으로 내뱉은 날이나

문득 죽고 싶다던 친구의 목소리를 애써 모른 척한 날이나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던 날이나

풀린 신발끈을 묶지 않고 집까지 걸어갔던 날이나

모르는 사람의 머나먼 호의에 마음이 달구어졌던 날이나

뜨겁게 데운 물통을 품에 안고 겨울잠에 들었던 날이나

아침마다 사는 게 싫다고 속으로 투정 부렸던 날이었다.


나의 생명은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받았고

나의 삶은 세상을 점지한 신이 만들어 준 것이라는데


어머니 아버지께 생명을 전가할 힘이 없고

전지전능하여 모든 생명체를 사랑할 능력이 있는 신은

정작 삶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그리하여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아스팔트 바닥에 남는 발자국은 물에 젖은 밑창뿐이다.


나는 흔적도 남지 않은 자취에 안도해야 하는 것인가

맨발을 물에 적셔 딱딱한 바닥을 걸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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