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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Jan 28. 2023

태초에는

자작시


거실 창가에 앉아 차갑고 선명하게 식은 하늘을 보며

책을 읽다가 문득 창밖에 펼쳐진 황량한 산을 봅니다


푸른 이불을 잃어 메마른 뼈를 드러낸 것들이 줄지어 선

이따금 먹이 잃은 고라니가 어슬렁거리기도 하는

갈빛 낙엽을 발자국 삼아 걸어야 할 것 같은 산입니다


태초에는 저 산의 땅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졌겠지요

물이 가득한 행성이 별안간 대지를 가지게 되면서

그렇게 만들어진 산에 울타리 따위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산은 축축한 땅덩어리와 고운 흙을 잃고

나무가 베이고 수많은 뿌리가 뽑혀 나가며 아팠을까요

마치 살갗이 뜯기고 혈관이 잘려 나간 사람처럼 말이에요


잃어버린 숨결 대신 찾아온 것은 콘크리트였을 것이고

부러진 뼈를 지탱한 것은 수많은 철근이었을 겁니다

도로가 깔리고 높은 아파트가 지어지기 시작했을 즈음


태초의 산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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