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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Jan 09. 2022

나에게는 '나의 것'이 있다.

그리고 그건 모두에게 존재한다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된 트로피컬 하우스 장르 노래가 마음에 들어 가수를 찾아보았다. '슈퍼밴드'라는 프로그램에서 우승을 차지한 밴드 <호피폴라(Hoppipolla)>였다. 특이하게도 여느 밴드처럼 드럼과 베이스 기타가 한 명도 없고 오로지 기타나 건반을 연주하는 밴드. 심지어 한 멤버는 밴드에서는 굉장히 생소한 첼로를 연주하는 첼리스트였다.


당연히 밴드의 기본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드럼과 베이스 기타라는 구성이 빠지고 첼로가 들어간 밴드라니. 과연 첼로 소리가 밴드 음악과 잘 어우러질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뻔한 고정관념 따위는 가볍게 부숴버리겠다는 듯, 잔잔한 강물이 흐르는 듯한 아름다운 첼로 소리는 이 밴드의 노래에서 결코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그렇기에 그들만의 음악이 탄생할 수 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창 노래를 들으면서 지내던 중, 유튜브를 둘러보다가 밴드가 아직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었을 때 영상을 보게 되었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DJ 프로듀서 故 아비치(Avicii)의 노래 <Wake me up>을 컨트리로 편곡하여 연주하는 무대 영상이었다.


원곡은 초반부터 신나는 컨트리 기타 소리로 시작되지만, 이 무대는 노래 중간까지 잔잔한 첼로와 기타, 고요하고 섬세하면서도 어딘가 서글픈 보컬로 이어진다. 그리고 2절이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전환되고 조명이 밝아지며 모두가 즐겁게 자신의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시작한다. 이때 첼로 연주는 가히 금상첨화인데, 웅장하고 우아한 클래식 음악에서만 쓰일 것 같은 첼로가 이토록 밝고 친근한 멜로디라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즐겁게 노래를 들으면서 무대 영상에 달린 댓글을 보던 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댓글이 몇 개 있었다. 내용과 말투는 제각기 달랐지만, 함축적으로 포함된 뜻은 같은 댓글이었다.




"무대를 위해서 자신의 악기를 내어주다니 정말 멋있다."

"악기에 손을 대게 하는 게 엄청난 변화인데, 곡을 위하고 팀을 위하는 마음이 진짜인 것 같다."

"멤버들이 모두 첼로를 연주하는 장면에서부터 이미 무대가 완성되었다."




무대가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건 기타도 건반도 보컬도 아닌 첼로다. 옆에 있던 멤버들이 한 명씩 다가와 조심스럽게 첼로의 현을 튕기며 음을 내거나 첼로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리듬을 만들어내는, 오직 첼로 한 악기만으로 노래의 시작을 알리는 퍼포먼스.

이 댓글을 보면서 무슨 뜻일까 싶었다. 악기를 내어준다는 게 뭐지? 악기에 손을 대면 안 되는 건가? 나는 연주해본 악기라고 해봤자 피아노, 리코더, 탬버린과 트라이앵글과 캐스터네츠 정도가 전부인 음악 문외한이다. 그렇기에 악기에 손을 대는 게 대단하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원래 악기는 손으로 연주하는 것이고, 누구나 연주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댓글을 살피고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취미가 아니라 전문적으로 악기를 다루고 연주하는 악기 연주가에게 '자신의 악기를 다른 사람이 연주하게 하거나 손을 대게 하는 것'은 엄청난 결심이 필요한 일이라더라. 하나에 최소 수백만 원에서 비싸게는 억대를 호가하는 가격도 가격이지만, 본래 전문적으로 다루는 악기는 예민하고 섬세한지라, 조금만 잘못되어도 소리가 이상해지거나 악기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한다.

첼로를 연주하는 멤버분은 아예 음악대학교를 재학하고 첼로 전공으로 졸업하신 첼리스트. 그러니까, 그분은 멤버들이 자신의 첼로를 연주하다가 첼로가 망가지거나 소리가 이상해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무대의 구성과 노래를 위해 기꺼이 다른 멤버들이 '자신의 첼로'의 현을 만지고, 몸체를 두드릴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 무대를 보고 악기의 귀중함이 단순히 '가격'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만약 어떤 이유로 악기가 망가져서 연주할 수 없게 되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악기를 고치거나 새로운 악기를 구매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단순히 '엄청 비싼 악기가 부서졌다!'에서 그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똑같은 곳에서 만든 똑같은 악기를 구매한다고 해도 결코 기존의 악기와 똑같은 느낌, 안정감, 그립감을 받을 수는 없을 테니까. 마치 똑같은 재료에 똑같은 방법을 쓴다 해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음식 맛이 달라지는 것처럼.

나는 악기를 연주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악기가 아닌 것과는 수없이 많이 살아왔다. 내가 수도 없이 글을 쓴 노트북도 점점 낡아가면서 새로운 노트북으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와 동시에 나의 손가락과 자세와 시선에 맞추어진 노트북이 아닌 새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 들기도 한다. 물론 기계는 역시 새 것이 좋긴 하지만.

악기 연주가에게 악기는 단순히 직업을 위한 도구가 아닐 테지. 살아있지 않지만 수년 동안 함께 호흡을 맞춘 동료일 수도 있고, 온전히 나에게 맞추어진 모습으로 조금씩 가꾸어진 투영체일 수도 있다. 갑자기 새 악기를 주면서 "당신이 지금 쓰는 악기보다 훨씬 비싸고 좋은 악기입니다. 앞으로 이것으로 연주하세요!"라고 한다면 흔쾌히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라면 "나에게 가장 좋은 악기는 지금 나와 함께하는 이 악기입니다."라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삶에도 악기 연주가와 소중한 악기의 관계성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었다. 오직 나에게 맞는 것. 의도하지 않은 사이에 나에게 맞추어진 것. 나의 것을 조금씩 만들어가는 것도 삶의 일부분이자 과정이지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내 마음에 드는 것을 가지고 싶어 하고 나에게 편안한 곳에 안주하고 싶어 하니까.

살아가면서 꿈이 없고 길을 잃어버리더라도 천천히 걸어가는 그 길이 곧 나의 길이고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이듯이, 나에게 맞는 악기로 나만의 음악을 연주하는 건 정말 나 이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각자의 삶에 맞는 악기. 나에게 맞는 나의 것을 만들어가면서 완성되는 하나의 음악.

요즘에는 삶을 하나의 모험이자 음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 막막하고 장황하더라도, 끝을 알 수 없고 전개를 모르기 때문에 지금의 나를 조금 더 너그럽게 바라보고 아름다운 선율을 들을 수 있는 마음. 사실 나는 그런 것을 추구하고 싶다. 머리가 좋고 실력이 뛰어나 모든 우수하게 해내고, 눈치가 빨라 사회생활을 잘하고, 철저한 계획 속에서 성과를 이루며 훌륭하게 성장하는 인생도 너무나 부럽고 좋겠지만, 나에게 그건 '나를 위한 일'보다는 '남에게 존경받고 인정받기 위한 것'에 가깝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명예는 내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다.



나에게 맞는 것. 나의 소리와 음악. 나의 악기. 나는 이런 것들을 찾고 싶다. 가지고 싶다. 내 몸에 딱 맞는 악기가 하나 있다면 나도 멋진 선율로 노을빛을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 이런. 생각하다 보니 또 욕심이 난다.

나침반도 등대도 이정표도 하나 없이 불안한 길을 걸을 때도 많겠지만, 이 역시 나의 연주이니. 음악이니. 목적이 없는 유랑이자 여정이고 모험이니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어둠이 찾아오고 추위에 떨고 넘어져 다치더라도, 숲을 나가면 다시 드넓은 하늘과 그리운 들판이 바람에 연주되고 있을 테니까.

나의 인생은 내가 아니면 연주될 수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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