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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Mar 23. 2024

한 문장도 하나의 이야기로

머릿속을 지나가는 말들_10


책을 읽다가 마주치면 궁금해지는 글이 있다.


우리는 한참이나 게임을 했다, 거리를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함께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나란히 한 침대에 누웠다. 순식간에 시간을 뛰어넘고 행동이 진행과 완료를 동시에 하며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장면.


나는 이 짧은 문장 동안 그들이 어떤 게임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옷을 입고 얼마나 빠르거나 느린 속도로 걸으면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카페에서 무슨 음료수를 마시고 어떤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땠고 저녁식사 메뉴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무엇이었을지. 침대에 누워서 서로를 마주 보았을지 등졌을지 나란히 천장을 바라보았을지. 그 속에 담긴 하나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가령 소설에서 이런 문장이 나온다고 치자.


가다와 나라는 따뜻한 손바닥을 각자의 주머니 속에서 주무르며 서늘한 목덜미에 어깨를 떨었다. 집 앞 골목까지 다다르는 동안 가다와 나라는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내일이면 기억나지 않을 잡담이었고 가다가 던진 말장난에 나라가 웃었다는 사실도, 대화 중간중간 삼 초에서 오 초 정도의 침묵이 감돌았다는 사실도 금세 잊어버릴 것이다. 아마 가다가 대문을 넘는 순간이나 나라가 문고리에 열쇠를 넣고 돌리는 순간부터. 가다와 나라는 잠자리에 들 때까지 서로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궁금해진다. 일단 각자의 주머니에 넣은 손바닥이 따뜻하고 목덜미가 서늘한 걸 보면 해가 지고 기온이 뚝 떨어진 저녁 즈음이겠구나. 여름은 낮이나 밤이나 늘 더우니까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은 가을.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 이야기는 얼마나 사소하고 영양가 없는 이야기였길래 내일이 되자마자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많은 이야기가 가능할 정도로 집까지 거리가 멀었던 거겠지.


가다가 한 말장난은 뭐였을까, 나라는 그 말에 진심으로 웃었을까, 대화 중간중간 공백이 찾아올 때마다 가다와 나라는 공연히 어색한 공기에 휩싸였을까.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가다와 나라는 뭘 하고 어떤 생각을 할까…. 별게 다 궁금해진다. 별다줄이 아니라 별다궁이 된다. 막상 궁금하기만 하고 제대로 상상하지는 않는 것까지 화룡점정이다.




특히 분위기가 무거운 작품이거나 등장인물 간의 관계가 고요한 파멸을 맞이하고 있을 때, 혹은 아주 고독한 소설을 읽을 때 이러한 문장이 나오면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 그 모습은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그 일을 마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세세하게 나온다면 분명 글은 지루해질 것이고 상상은 반감될 것이다. 그리고 작가에게도 힘들고 귀찮은 과정이 된다. 굳이 '무엇을 했다'라고 뭉뚱그려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는 이유는 있다.


언젠가 '그들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라는 한 문장을 긴 이야기로 쓰는, 무모한 도전을 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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