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태어남이 자유가 아니었듯 죽음 또한 자유롭게 정할 수 없는 것이 삶. 때로는 그런 오만을 지니고 살아간다. 나는 절대로 끔찍하게,고독하게 죽을 리가 없다고.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가 아니다. 아예 하나의 종이다. 종이가 뒤집히면 그 즉시 삶은 죽음이 되고 죽는 순간 모든 삶은 끝난다. 나의 육체는 서서히 썩어 문드러지고 의식과 감각과 영혼은 사라진다. 하지만 평소에 내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죽음에 잠식된 삶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것과 같고, 죽어가는 사람보다는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기에 죽음에 대한 상상은 이따금 머릿속을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다만 종종 상상한다. 나는 언제고 반드시 죽을 텐데,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이유로 죽을지. 내가 죽고 나면 슬퍼할 사람이 있을지. 내가 죽어갈 때 나의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지.
모두가 평온한 죽음을 원한다. 갑자기 차에 치이거나 건물에 깔려서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한 채 맞이하는 죽음, 오랫동안 병을 앓으며 고통 속에서 잠기는 죽음, 타인에 의해 살해당하는 끔찍한 죽음 따위가 아니라, 육체를 끌어안고 적당히 살아가다가 별안간 잠들면서 맞이하는 평온한 죽음을 바란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고 나는 괴로움 하나 없이 조용히 죽어가고 싶다고. 그건 가장 이상적인 죽음이고, 현실은 참 각박하고 냉혹해서 이상적인 죽음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편안한 죽음마저도 운에 따라 결정된다. 불미스럽게 죽은 이는 그저 불운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런 죽음을 운명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가끔은 사람들이 지나친 오만 속에서 살아간다고 느낀다. 요즘 유품정리사 김새별, 전애원 작가가 집필한 책 <남겨진 것들의 기록>을 읽으면서 고독사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다. 장애인이나 노인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자신의 죽음에 자만하는 사람 또한 이상하게 보이는 건 사실이다. 죽음에 무관심한 사람은 그렇다 쳐도 자신이 편안하게 죽을 거라고 어떻게 자신하는가.
노인을 하대하고 혐오하는 사람은 자기도 언젠가는 저렇게 늙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가. 장애인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사람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장애 없는 신체와 정신을 가지고 있을 거라 믿는가. 별안간 길을 걷다가 죽은 피해자를 탓하고 고독사한 고인과 그 유족을 비웃는 사람은 자신이 과연 얼마나 이상적인 죽음을 맞이하리라 생각하는가.
수많은 형태를 향한 죽음의 가정은 도리어 삶을 생각하게 만든다. 애석하게도 사람은 자신도 그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들어야만 비로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는 자기중심적인 동물이라서. 죽음을 생각한다면 삶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을 고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에 대해서도 제대로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