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기지
<안전기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 대상, 공간으로, 애착이론에서 세상을 탐색하고 돌아와 재충전하는 발판이자 안식처이다>
갓 스무 살이 된 내가 집을 뛰쳐나와 할 수 있는 건 그닥 많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낮에는 카페 서빙, 저녁에는 막걸리 집 서빙을 했다. 이제 막 사회에 아무런 베이스 없이 나와 있는 여자아이에게 세상은 험난하고 무서웠다.
고수익 보장이라는 말에 찾아간 술집 아르바이트가 막상 갔더니 TV에서나 보던 룸 술집인 걸 알고 뛰쳐나와 강남 한복판에 주저앉아 울던 날. 집을 나와 있는 나의 상황을 듣고 도와주겠다며 접근하려다가 거절당하니 화를 내던 카페 직원. 침대 하나 겨우 들어가는 고시원 방에서 옆방의 소음을 참아가며 잠들어야 했던 밤.
나에게 안전기지란 단 한 순간도 존재한 적이 없어서 조금이라도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나를 지키는 건 나뿐이고, 내 뒤엔 아무것도 없으니까.
결국, 아빠의 항복 선언과 함께 한 달여 간의 가출 생활은 끝이 났고 집으로 돌아와 무사히 합격했던 대학에 등록할 수 있었다. 어쩌면 아빠가 경제활동을 하지 못했던 건 나에겐 천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절대로 등록금을 주지 않았을 테니. 하지만 내가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서 갑자기 가정에 평화가 찾아오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아빠는 술에 취해 엄마의 카드를 들고 나가 몇백만 원을 긁어 자신의 자격지심을 채우려했고, 카드 결제 알림을 받고 급하게 카드를 정지시킨 엄마를 집에 와서 때리는 나날의 반복이었다. 대학에 간 나에게도 자유란 없어서 그 딴 대학 들어간 네 배를 칼로 쑤셔 죽여버리고 싶다는 둥의 막말이 날아오기 일쑤였고 아직 고등학생이던 동생 역시 아빠의 폭력과 폭언 속에서 살았다.
대학 첫 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 좋은 어투로 건네는 말이었지만 분명히 내게는 강요였던 말을 아빠가 뱉었다. 반수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그냥 한 번 생각만 해보라고.
나는 확신했다. 저 말은 저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언성은 높아질 것이고, 폭언이 시작될 것이다.
결국은 또 폭력이 될 것이다.
나의 인생을 이렇게 휘둘릴 수는 없다. 당신이 내 인생을 결정지을 수 없다. 나는 벗어나야겠다. 이 끝없는, 당신이 만든 이 끔찍한 지옥에서.
그렇게 내 인생 두 번째 가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