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견디지요.
워킹맘이 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출산 휴가 이후의 공백 기간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업무에 빠르게 적응하려고 노력하는게 아니라 스스로를 낮춰서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몸담고 있는 업계가 심한 불황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급여를 받는 직장에서 근무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회사가 자체적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하기도 했고 경쟁 업체에서도 구조조정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려고 더욱 노력했는지 모르겠다.)
콩쥐는 자신을 괴롭히는 계모 밑에서 어렵게 살면서도 모든 부조리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시키는 일도 열심히 한다. 반면 팥쥐는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얼마나 잘했는지를 공개적으로 떠벌린다.
여성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주저하며 스스로를 낮추는 자세가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성과를 당당히 알리기보다는 회사가 알아서 잘 평가해줄 것이라 생각하고 만다. 때로는 연봉 협상을 하면서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상사의 재량이라 생각하고 자기 몫을 쟁취하지 않는다.
(여자의 미래 - P51)
가끔은 스스로 만족할 정도로 어느 정도 마음을 내려놓았다고 겸손하게 직장생활을 잘 해내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나는 겸손한게 아니라 콩쥐 증후군에 걸려서 회사에서 발휘할 수 있는 역량과 재능을 스스로 제한하고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깨달았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상사로부터 어떤 예산용 프로젝트 업무를 하나 받았는데 프로젝트 규모, 실행 시기, 수주 가능성, 경쟁 업체 등의 주요 정보를 공유 받지 않은 상황에서 데드라인을 지키기 위한 긴급성을 고려하여 열심히 스펙을 검토하고 경쟁력 있는 모델을 선정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한참 진행하고 있던 중 이 프로젝트 자체가 실행 가능성이 많이 낮은 데다 우리 회사에 크게 메리트가 없는 프로젝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속상한 마음에 상사에게 건의하려 했지만 콩쥐 증후군에 단단히 걸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상사가 만약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주요 정보를 공유 하였더라면 가능성 없는 일에 맨파워를 낭비하지 않고 가능성 있는 일에 집중해서 효율적으로 업무를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 공유를 꺼리는 상사에게 목소리를 내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 되어버려 용기를 낼 수 없었다.
회사 사정이 어려울 경우 구조조정 1순위가 워킹맘인 경우를 수도 없이 본데다가 출산 휴가나 육아 휴직 후 복귀 했을 때 다른 조직으로 발령이 나거나 인사 평가 또한 좋지 않은 경우를 많이 봐왔고 가정보다 회사 일을 우선시하는 전근대적인 회사 문화 때문에 워킹맘의 사정 (아이가 아파서 어쩔수 없이 연차를 사용하거나 조퇴할 때)을 고려하지 않아서 나를 포함한 수많은 워킹맘 "일하는 엄마"는 생계문제 떄문에 어쩔수 없이 불합리한 조건에서 일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들 때문에 조직에 정면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거니와 괜한 구설수에 오르지 않기 위해서 눈에 띄지 않고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최고의 미덕처럼 여기게 되었다.
게다가, 차별을 느낄 정도의 부당함과 부조리함을 경험할 때 억울한 마음이 생기더라도 "생계문제" 때문에 늘 참는 위치에 있다 보니 어느 순간 "나"라는 존재감은 없어지고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처럼 기계적으로 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 입사 했을 때의 큰 뜻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의욕적으로 달려 들었던 열정과 에너지는 어느 새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고 "적당히" 일하며 "적당히" 급여를 받고 "적당히" 가늘고 길게 가자는 나태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회사란 조직을 두려워하다보면, 이상하거나 부조리하다 싶은 부분이 있어도 조직의 힘 앞에 목소리를 내길 주저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을 겨를이 있다면 정면에다 대고 목소리를 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퇴사하겠습니다 - P 10)
나 또한 회사 조직을 두려워하는 한 사람으로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정면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참으면서 혼자 삭히거나 조직과 관련 없는 사람들에게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는 일이 종종 생기고 있다. 문제는 다른 곳으로 이직하면 더 힘들고 어려울 거라고 자기 합리화 하면서 권리를 포기한 채 이런 상황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스스로를 틀 안에 가둬놓고 있다.
퇴사하겠습니다의 저자가 책에서 조언 한 것처럼 정면으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라 나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주변 사람들은 인생 다 그런거라고 억울해도 불합리해도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면서 직장에서 정규직으로 근무하는 나를 곧 잘 부러워하지만 그 부러움의 시선들 때문에 내가 위로를 얻고 있는 것은 아니다.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상황과 너무나도 익숙해진 직장 환경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이직하기 힘든 두려움, 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겠다는 용기가 없기 때문에 오늘도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하루를 보내고 있다.
3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 탓과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환경적인 조건으로 오늘도 용기를 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정말 언젠가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인생의 행복을 느끼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