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층 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몸부림
지난 번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가정환경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아이들이 자라는 지역의 환경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나름 비싸기로 유명한 동네지만 무리해서 집 한채를 매수했다.
실거주도 중요하지만 투자 가치도 따졌기 때문에 집 값 상승의 호재가 다분한 지역에 집을 매수했고 아직 잔금을 치르기 전인데 우리가 매수한 금액보다 큰 금액의 호가가 형성되어 있다.
부동산에 이렇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건 내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다.
내 글을 처음부터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나는 흙수저 출신이다. 집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배를 곯거나 누울 자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스스로 조달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나와 달리 나와 결혼한 남편은 부유한 가정 환경 속에서 여유롭게 자랐는데 우연치 않게 어린 시절 이야기 하다가 지역 간의 격차를 심하게 느낀 계기가 있었다.
어린 시절 나는 다가구 주택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재래식 화장실을 초등학교 때 까지 사용을 했었고 중학생이 되면서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내가 살던 집은 반지하 연립주택이었다.
같은 중학교에 다니던 친구들도 나랑 비슷한 형편이었는데 다들 부모님이 경제 활동 하느라 집에서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보니 비행 청소년으로 탈선하기 쉬었다. 물론, 안 그런 친구들도 있었지만 내가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 중에 문제아도 있었고 힘든 부모님 돕겠다고 분식점에서 서빙하며 아르바이트 하던 친구도 있었고 한 부모 가정에서 자란 친구 등 전반적으로 열악한 가정 형편 때문에 사교육비가 요구되는 학원을 다니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기억이 나는게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에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브랜드가 있었는데 게스, 나이키, 리복, 필라, 리바이스, 닉스, 보이런던 등의 메이커가 핫한 시절이라 해당 브랜드를 입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은 모두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새 상품을 사기 어려운 친구들은 중고 상품이라도 구매하기 위해서 아르바이트 하던 친구들도 있을 정도로 나이키와 닉스는 중학생들에게 일종의 종교였고 판타지였다.
그리고 대체로 어려운 형편이다보니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서 대학을 목표로 하는 친구들 보다 상고나 공고에 입학한 친구가 한 반에 절반 넘게 차지 했었다. 당시 한 반에 55~58명 정도 학생이 있었는데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은 대략 20~25명 정도 되었던 것 같다.
남편은 그 유명한 강남 8학군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졸업을 했고 IMF를 직격으로 맞았던 90년대 후반 고등학생 때 80만원 짜리 수학 과외를 받았으며 친구들 사이에서 구찌 지우개, 버버리 셔츠, 페레가모 구두 등이 핫한 아이템이었다고 한다.
공부를 지지리 못했던 남편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서 연합고사를 치뤄야 했는데 상고나 공고로 진학하는 것은 대단히 창피한 일이라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공부를 했었다고 한다.
내가 왜 상고나 공고로 진학하는 것이 창피한 일이었냐고 물었더니, 한 반에 상고나 공고로 진학하는 학생이 거의 없을 뿐더러 상고나 공고의 교복을 입으면 사비로 돈 내고 공부할 수 있는 독서실에서도 공부 분위기 흐린다고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는데 공부 안하던 학생이 고등학생 되었다고 정신차리고 공부하란 법은 없었으니 남편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공부에 거의 손을 놓았다고 한다. 과외랑 학원 수업을 자주 빼먹고 친구들이랑 놀러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나마 80만원짜리 수학 과외 덕분에 수학의 기초를 다질 수 있어서 대학 진학이 가능했었다고 한다.
처음에 그런 이야기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황당 했었는데 같은 서울인데도 지역 격차를 심하게 느낀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가장 큰 격차를 느꼈던 건 성인이 되었을 때의 모습인데 중학교 동창 중에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내가 유일했고 그때 힘들게 살던 친구들은 여전히 어려운 형편 속에서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
중학교 동창인 J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적이 있었다.
"내 친구 중에 네가 유일하게 대학 나온 친구니까 내 결혼식 때 꼭 와줘"
반면 남편의 동창들은 공부 하나도 안하고 사고 치면서 부모님 속을 그렇게 썩였는데 경제적으로 든든한 가정의 울타리 속에서 자란 덕분인지 대부분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외국계 기업 등의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거나 부자 부모님 덕분에 가업을 물려 받으며 전반적으로 잘 살고 있었다.
아이들을 낳고 산후 조리원에서 응답하라 1988을 시청할 때였다.
성동일이 아들 노을의 하교 시간에 맞춰서 학교로 찾아간 장면이었는데, 노을의 친구들이 "노을아, 반지하" 라고 부르는 것을 듣게 됐다. 하지만 더 마음이 아팠던 것은 노을이 이같은 '반지하'라는 부름에도 해맑게 웃으며 대했다는 것이다. 충격을 받은 성동일은 그날 홀로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들이켰고 해맑은 아들의 모습에 웃음으로 답한 뒤 뒤돌아서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되뇌이는 장면은 내 마음을 참으로 짠하게 만들었다.
반지하 연립주택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그 장면이 유난히 더 크게 다가왔는지 모르겠지만 부모 입장에서 내 자식들이 친구들에게 그런 식의 놀림을 받는다면 나도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지역 격차를 심하게 느끼게 해준 남편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그렇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 학업을 마친 내 경험을 비춰 볼 때 내 자식들에게 만큼은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조금 복잡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들로 부동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할 수만 있다면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