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름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다른 차원의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노후 계획이라든가, 취미 생활이라든가, 혹은 진로에 대한 고민 같은 것들. 나도 물론 그런 고민을 전혀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요즘 들어서는 노후에 대해 꽤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의 취향이 무엇인지 탐색할 여유도 조금은 생겼다. 겉으로 보기엔 우리 집에 느린 아이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지내는 날도 많다.
하지만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질문은 늘 같다.
과연 이 아이가 잘 자랄 수 있을까. 이 아이는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 그리고 더 솔직하게는, 노후의 어느 시점에서도 나는 여전히 이 아이를 보조하느라 지금처럼 동동거리며 살고 있지는 않을지—그 불안이 나의 근원적인 고민이다.
그래서 가까운 미래에 어디에서 살 것인가를 고민할 때도 기준은 늘 부동산 투자가 아니다. 이 아이의 교육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는 곳, 치료센터 접근성이 좋은 곳이어야 한다. 내 업무 역시 아이의 치료 리듬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선택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 집엔 ADHD를 가진 첫째도 있으니, ‘느린 아이 하나 키우는 집’과는 또 다른 계산이 필요하다.
남편이 양육이나 집안일에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이제는 더 이상 서운해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것 역시 나의 미래 계획 안에, 냉정하게 포함시켜야 할 변수다.
방학을 맞아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다른 학교로 전근 간 옛 동료 교사들과 미래 계획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마음 한편이 씁쓸해졌다. 그들의 이야기가 유난히 럭셔리하게 들렸다. 설령 그것이 40줄에 들어선 친구의 진로 고민일지라도.
나도 애써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날은 끝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꼭 그런 날이다.
아이 둘은 더 요란하고, 남편은 저녁 약속이 있다. 첫째는 영어학원에서 단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재시험을 봐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친구와 놀기로 했다며 나에게 몹쓸 성질을 냈다. 이미 상처받아 있던 나는, 더 큰 목소리로 아이에게 앙갚음을 했다. 서로에게 스크래치를 내고, 결국 후회가 예정된 밤이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또 상처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다.
이 고민들이 나를 무너뜨리는 증거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끝까지 책임지고 살아가려는 사람의 흔적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의 미래가 럭셔리해 보이는 날에도, 나는 내 삶의 무게를 외면하지 않고 여기까지 걸어왔다. 오늘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 아이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상처를 냈지만, 적어도 이 고민을 글로 적어낼 만큼의 힘은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다.
아마 내 인생은 끝까지 ‘계산하며 살아야 하는 인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산 속에서도 아이를 사랑했고, 도망치지 않았고, 하루를 버텼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오늘 밤은 씁쓸하지만, 이 글을 쓰고 나면 나는 다시 내일의 나로 돌아갈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