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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람없는 사람들

by 오선희

나는 기억한다. 교문 기둥에 등을 대고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던 초등학교 입학식의 나를. 이제 초등학생(엄밀히 말하면 국민학생)이 된다며 마냥 기뻐할 만도 한데, 그때 나는 기분이 안 좋았던 것 같다. 그때 당시 아빠는 큰 교통사고를 당해 오랜 병원 생활을 하고 막 퇴원을 한 상황이었다. 아빠는 머리를 크게 다쳐 머리카락을 다 밀고 뇌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퇴원할 땐, 머리에 붕대를 감고, 그 위에 그물 모양으로 짜인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냥 집에 있지, 아빠는 굳이 입학식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만 해도, 운동장에 반별로 줄을 세우고,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교실로 들어가는 시스템이었다. 키가 작았던 나는 앞에서 두세 번째 정도에 서 있었고, 내 눈에 아빠가 보이길래 인사를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아이가, “너네 아빠 스님이야?”라고 했다. 참 어렸지만, 그때도 나는 “이 자식 선 넘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가족은 건드리는 게 아닌데,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 얘길 하는 아이에게 죽빵을 날릴 뻔했다. 다행히 내 옆에는 그 말이 친구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라는 것을 아는 착한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그 친구들이 날 말려 주어서, 천진난만한 개소리의 그 아이는 얼굴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그럴 수 있다. 아직 잘 모르니까. 가끔 그런 무람없는 태도는 무럭무럭 자라는 과정 중에 나타나는 실수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말 ‘무람없다’는 ‘예의를 지키지 않으며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 없다.’라는 뜻이다. 적당하게 무람없는 아이들은 가끔 귀엽기까지 하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가. 소파 모서리를 톡톡 밟고 다니다가 베란다로 넘어져, 작은 항아리를 머리로 깨뜨려 버린 일이 있었다. 깜짝 놀란 엄마가 나를 들춰 안았는데, 이마에서는 피가 몽글몽글 스며 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그 길로 나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이마를 다섯 바늘쯤 꿰매고, 엄청 커다랗고 하얀 솜을 이마에 딱 붙이고, 다음 날 학교에 갔는데, 또 천진난만한 아이가 “이마에 뭐냐, 감자냐?”라고 말했다. 그땐 화가 나서 씩씩거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귀여운(?) 무례함이었다. 참신하기까지했다. 지금은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그땐 그럴 여유가 없었나 보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어색하게 이마를 가렸고, 그 친구랑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마에 있는 솜 감자를 쏙 빼서 입에 넣는 시늉이라도 할걸. 한 번 웃길 수 있었는데, 웃길 기회를 놓쳤다는 아쉬움마저 든다.


어린 시절 무례하다고 겪었던 일들 중 대부분은 모두 회복 가능한 것들이었다. 헛웃음을 지을 만한 하찮은 것들. 그들의 무례함을 잘했다 칭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그 말들은 내 삶에 큰 상처를 내지는 못할 정도의 하찮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무람없던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었는데도, 계속 무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몸은 컸으나 말이나 자세는 크지 않은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건 문제가 크다. 어린아이들의 무례함은 몰라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어른들의 무례함은 (몰랐다고 말하지만) 알면서도 일어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기억한다. 옷을 좀 바꿔 입고 오라 했던 선배의 말을. TPO를 맞출 만큼 옷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던 대학 시절, 마침 하고 싶었던 건 학교 방송국 아나운서였다. 취재 현장에서 마이크를 든 나는 카라 티에 면 바지, 카메라를 들고 있던 동기는 블라우스에 치마를 입었던 그날,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있던 선배는 “너네 둘이 옷이 바뀐 것 같다”며, “넌 아나운서 같지 않다”며 무안을 주었다. 난 차려 입을 만한 옷이 없는데... 그땐 그 말이 내 가난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그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카메라를 들고 있는 동기와 자리를 바꿔야 하나 생각했던 자존감 바닥이었던 나를 후회한다. 부드럽게 차근차근 말해 주면 다 알아들을 텐데, 사람들 많은 데서 뭐 그렇게 무안을 줄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그때 옷으로 핀잔 주며 지 옷 또한 형편없었던 그 선배의 말이 마음에 맺혀 있다. 상대방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고 무안을 주는 행동은, 상대가 무럭무럭 자랄 기회를 막는 것 같다. 참 무람없다.


‘제가 악의는 없는데요,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요’와 같은 말로 포장해서는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말들을 서슴없이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해 놓고, 자신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동조하는 분위기이면, 쉽게 안심하고 ‘거봐,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야’라며 사과하지 않는, 무례한 사람들이 보인다. 누군가 그의 말에 하트를 눌러주면 거침없이 펼쳐 나가는 개념 없고 무람없는 말들. 무람없는 말들이 범람하는 세상은 희망이 없다. 중학교 교과서에 ‘오아시스 세탁소’라는 작품이 나온다. 그 작품에서는 인간의 도리를 잊은 사람들을 세탁기에 넣어 싹 빨아 빨랫줄에 걸어 놓으며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너무나 판타지 같은 내용이지만, 그 결말에 눈길이 가는 건 무례하지 않은 세상 속에 살고 싶은 내 소망이 너무도 크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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