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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푸르, 푸르디푸르다

by 오선희

청주 동물원에 살고 있는 호랑이 이호는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다. 그래서 이호는 사람을 유독 좋아한다고 한다. 이호는 사람을 보면 ‘푸르푸르’ 거리는데, 이것은 공격 의사가 없음을 보여 주는 호랑이의 언어라고 한다. 호랑이가 야생성을 잃고 사람에게만 길러진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싶지만, ‘상생’이라는 차원에서 보았을 때, 인간에게 마음을 열어 준 이호의 ‘푸르푸르’가 고맙고 감동적이기만 하다. 이호의 세상이 푸르디푸르기를 바란다.


우리말 ‘푸르디푸르다’는 ‘더할 나위 없이 푸르다.’라는 뜻이다. ‘푸르다’라는 말에 어미 ‘-디’를 붙여 강조의 의미를 담았다. 강조 어미 ‘-디’는 여러 곳에 쓰인다. 예쁜데, 심하게 예쁘면, ‘예쁘디예쁘다’. 넓은데, 또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넓으면, ‘넓디넓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호랑이 이호가 보여 준 ‘푸르푸르’는 이 강조 어미 ‘-디’처럼 ‘푸르다’를 강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신을 공격하지 않아요. 우리의 관계는 푸르디푸를 거예요’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도 이런 호랑이 같은 녀석들이 있다. 토요일 저녁마다 우리 집에 와서 공부하는 중학교 3학년 삼총사. 초등학생 티를 채 못 벗은 꼬마 시절부터 봐 왔는데, 어느덧 중학교의 최고 학년이 되어, 키도 덩치도 호랑이처럼 커졌다. 말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선생님을 이겨 먹으려고 으르렁거리는 모습 또한 호랑이 같다.

숙제를 내 주면 인터넷에서 답지를 찾아다가 베껴 오고, 수업 시간에 졸리면 잠을 쫓아내려는 노력조차 안 하는 이 녀석들이 날 참으로 힘들게 만들었던 적도 있었다. 맛있는 간식을 줘도 “이거 싫은데 다른 거 없어요?”라고 묻는 통에 욕 한바가지 할 것을 쉼호흡을 하며 겨우 참아내기도 했었다. 이러다 우리 다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 나는 화병이 나서, 삼총사는 내 잔소리 때문에. 그래서 무슨 수라도 써야 할 것 같아, 토요일 수업 전에는 웬만하면 아무것도 안 하면서 내 컨디션을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집에 도착한 아이들의 컨디션을 살피며, 살살 다독였다. 그렇게 어느 한 명도 화내지 않고 수업을 진행해 오던 어느 날,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싶었던 날이 찾아 왔다.


시험을 보고 나면 학생들에게 카톡을 보내 점수를 묻곤 하는데, 시험을 너무 못 본 아이는 그걸 보내는 순간에 한 번 더 괴로울 것 같아서 빨리 점수를 알려달라고 채근하지는 않는다. 먼저 점수를 보내 오면 아무것도 더 묻지 않고, 잘했다, 수고했다, 엄지 모양 이모티콘 정도를 보낸다. 그런데 그날은, 나의 욕을 부르던 그 녀석이 먼저 전화를 한 것이다. “선생님, 저 시험 한 개 틀렸어요. 아, 근데 그거 수업 때 했던 것 같은데… 아쉽다…” 그 아이의 말대로 수업 때 엄청 강조했던 것을 놓쳐서 아쉬울 수도 있었지만, 그냥 그 전화를 받는 순간엔 모든 게 좋았다. 약간 흥분된 듯한 목소리, 중간에 자기도 살짝 쑥스러웠는지 대답은 ‘네’와 ‘예’ 사이의 애매한 발음으로 하는 그 목소리, 그리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친구들 목소리. 모두 좋았다.

왜 좋았을까?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그 이유는 이랬다.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과 함께 나오는 중에도 선생님에게 전화로 점수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에서, 아이의 신난 마음이 느껴져 함께 기뻤다. 생각보다 잘 보았지만 아쉽게 하나를 틀렸다는 에피소드를 선생님한테 들려 주고 싶어 한 것에서, 선생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생각하는 그 마음이 소중히 느껴졌다. 그 아이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한테 까불었던 게 통화 중간에 생각나서 대답은 대충 얼버무렸던 거였는데, 그것 또한 괜히 웃음이 났다. 그리고 이 아이는 누구보다 시험을 잘 보고 싶은, 욕심 있는 아이였고, 선생님을 이겨 먹으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사실은 공격할 마음은 전혀 없었던 푸르푸르 거린 호랑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 그 아이와의 수업은 내 웃음 버튼이 되었다. 공부하기 싫어서 툴툴대는 것, 내 말에 말꼬리 잡고 장난치려 하는 것 모두 타격감 제로다. 푸르디푸른 귀염둥이의 모습쯤으로 보인다. 이 아이가 자라서 사회생활을 할 때에는 살짝 선 넘는 행동은 바꾸어야 하겠지만, 어린 시절 자기를 포용해준 어른 한 명쯤은 있었다는 사실이 그 아이에게 큰 힘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몸은 어른이 되었어도 푸르디푸른 소년의 마음을 간직한 사람으로 자라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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