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를 타고 거울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조명에 비친 내 정수리 쪽에서 흰머리 한 가닥이 삐죽 삐져나와 있었다. 두 눈을 치켜뜨고 손끝에 힘을 주어 흰머리 한 가닥을 뽑았다. 그러고 나서, 습관적으로 머리를 들춰 보는데, 아까 그 흰머리는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되었다. 옆머리를 살짝만 들췄는데도, 검은머리 사이사이로 흰머리가 브릿지 넣은 것처럼 가닥가닥 잘 자리잡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나 흰머리가 많다니, 갑자기 서글퍼졌다. 요즘 마흔은 옛날 마흔 같지 않다던데, 마음은 그대로이지만, 머리가 먼저 늙어버린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엄마 흰머리를 뽑아주었을 때, 엄마는 늘 너네가 속 썩여서 흰머리가 생긴 거라 하셨다. 그러면 나는 죄책감을 안고 엄마의 흰머리를 하나하나 뽑았었다. 그런데 요즘엔 엄마가 내 흰머리를 뽑아 주신다. 그러면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엄마가 속 썩여서 그래”라고 말할까 하다가 “한 개의 50원”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흰머리가 어찌 늙어버린 모습만을 보여 주겠는가. 어떤 이는 젊은 시절부터 흰머리가 많아 주기적으로 염색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염색을 포기하고 흰머리를 매력 있게 기르기도 하지 않던가. 온 머리가 흰머리로 뒤덮인다고 해도 서글픔을 느끼기보다는 우산 없이 흰눈을 맞는 낭만적인 겨울을 살 듯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흰머리가 되어도 흰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말 ‘흰소리’는 ‘터무니없이 자랑으로 떠벌리거나 거드럭거리며 허풍을 떠는 말.’이라는 뜻이다. 대개 ‘흰색’은 ‘순수함, 깨끗함’ 같은 것을 상징한다고들 하는데, 왜 ‘흰소리’는 ‘허풍을 떨다’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가 된 걸까 생각해 봤다. 아마 허풍을 떠는 그 말에는 흰머리를 지닌, 혹은 흰머리가 자라기 시작한, 그러니까 인생을 어느 정도는 살아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만 섞인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다는 생각이 들면, 자기의 생각이 옳은 것인 양 다른 이에게 강요하고, 자기의 생각과 그의 생각이 다르면 화내고 무시하고, 괜한 사명감으로 남들의 삶을 바꾸려 한다. 이렇게 오지랖 섞인 말들이, 듣는 사람에게는 허풍 섞인 말에 불과할 것이다.
또 이런 생각도 해 봤다. 허풍을 떠는 말은 상대의 머릿속을 희게 만들어 버리니까, ‘흰소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상대의 말에 공감할 수 없을 때, 더 나아가 반감이 들 때, 우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이어나갈 말을 생각하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다. 말 그대로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이다. 상대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는 것에 말로써 이겼다며 자신감을 갖는 이는 없길 바라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이들은 늘 있어 왔고, 그들은 다시 또 남의 인생에 끼어드는 흰소리들을 할 것이다.
춤을 배우는 영상을 SNS에 꾸준히 올리시는 백발의 본부장님을 알고 있다. 그분은 자신보다 20살은 어릴 것 같은 댄서를 스승으로 모시고 함께 춤추고, 공연도 한다. 그리고 얼마 전엔 퇴임식 사진도 올라왔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가 보여주는 퇴임 즈음의 열정 넘치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다. 모르는 사람에게 댓글 잘 안 남기는데, 이번엔 용기를 내어 댓글을 남겼다. 박수 이모티콘만 남기기도 하고, 멋지다는 짧은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분은 꼭 ‘감사합니다’라고 답을 달아 주셨다. 나이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찾아나가는 그 열정이 참 멋있었고, 사람들의 칭찬에 감사를 표하시는 따뜻함이 참 좋았다. 이분은 회사에서도 분명히 흰소리하지 않는 분이셨을 것 같았다.
프리랜서로 일하고는 있지만, 연차가 쌓이면서 선배님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어쭙잖은 조언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진짜 멋진 말 해주는 선배가 되고 싶긴 하다. 어느 한쪽으로 ‘휜’ 소리도 하고 싶지 않고, 허풍을 떠는 ‘흰’소리도 하고 싶지 않다. 늘 중용을 지키며 감정의 골짜기도 봉우리도 만들지 않는 선배로, 어른으로 자라고 싶다. 이렇게 우리는 계속 자라야 한다. 흰머리가 자라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