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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렛대로 끌어올려

by 오선희

나는 오이를 먹지 않는다. 내가 먹는 냉면, 샌드위치, 김밥에 오이는 환영 받지 못한다. 예전에 다녔던 학원 원장 선생님께서 오이를 고추장 찍어 입에 넣어 주셔서 너무 당황했지만, 오이 못 먹는 하수처럼 보일까 봐 그냥 우걱우걱 씹었었다. 씹는 건 어떻게 했을지 몰라도, 삼키는 것까지는 무리였기에, 화장실 가서 이전에 먹었던 것까지 다 토했다. 이 맛있는 걸 왜 싫어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난 늘 “오이비누 먹는 거 같아서 싫다”라고 대답한다. 그렇다. 나는 오이를 접하기 전에 오이비누를 먼저 접했던 것이다. 세수하다 비누가 입에 들어갔을 때의, 그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함 같은 게, 나에겐 오이를 먹을 때 일어난다.


물론 오이를 본격적으로 먹어 보면, 맛 좋을 수도 있다. 오이비누와 관련된 선입견이 나를 오이와 친해지지 못하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오이는 안 먹어도, 오이피클은 먹는 걸 보면, 언젠가 오이를 먹을 가능성도 있겠다. 누군가 나에게 선입견이 무엇이냐 질문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오이비누 같은 거라고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오이비누보다 오이를 먼저 만났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우리 아파트에는 참으로 유명한 아주머니가 한 분 사신다. 그것도 우리 동에. 이 아파트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싸우는 듯한 누군가의 큰 소리에 잠에서 깼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그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아파트로 둘러싸인 놀이터 한가운데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목청이 얼마나 좋은지, 그 목소리는 주말 아침 아파트 사람 여럿을 깨울 만했다. 아주머니는 전화기 너머의 사람에게 마구 분노하고 있었는데, 공동생활의 매너를 지키지 않은 그 아주머니의 행동이야말로 우리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 사람이겠지, 뭐 큰 잘못을 저지르는 건 아니니까, 괜한 나쁜 마음을 갖지는 말자고 생각하다가도 어느새 나는 그 아주머니를 피해서 짧은 거리를 삥 둘러 가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날 것 같으면 다음 텀에 올라갔다. 아주머니에 대한 내 선입견이 오이비누처럼 미끌미끌 불쾌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 아주머니를 엘리베이터에서 딱 만나 버렸다. 그 아주머니는 나를 보더니,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셨다. 나도 따라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그 인사는 아주머니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것이었다. 근데 아주머니가 하시는 말씀을 곰곰이 들으니, 다른 사람과의 대화와 별 다를 것 없었다. 지레 겁먹고 물러섰던 날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우리말 ‘지레’는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 미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마침 '지레'의 또 다른 뜻에서, 앞서 말한 안타까움을 해소할 만한 방법을 찾은 듯했다. 또 다른 '지레'는 '무거운 물건을 움직이는 데 쓰는 막대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우리 곁에는 선입견으로 인해 대화를 시작도 못해 보고 관계가 소멸해 버리는 경우들이 많다. 물론 선입견이 선입견만으로 끝나 버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선입견이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 선입견은 더 굳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처음 가진 그 선입견을 없애 버리는 게 힘들다. 또, 선입견을 갖는 것은 사실 편하다. 불편해질 수도 있는 상황을 애초에 막아 주니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뭔가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 예를 들어 두서 없는 말을 하거나 갑자기 화를 내거나 눈빛이 흐려진 사람들과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들과 관계를 맺는, 힘든 일을, 또 무거운 일을 우리 모두 쉽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지레'다. 그들의 말 너머의 것을 봐주는 아주 작은 행동이 관계 형성의 지렛대 역할을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아주머니처럼 연약하신 분들이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무겁게 가라앉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관심의 지렛대로 그들의 마음을 살짝 들어 올려줄 필요가 있다. 살짝 들어올렸는데, 밑에 깔려 있는 문제들이 드러날 때, 또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들이 모일 때 조금은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아주머니와 나눈 대화는 꽤 신선하고 행복했다. 아주머니는 이 아파트가 세워졌을 때 분양 받아 이사 오셨고, 이웃들이 많았는데 많이 이사를 가셨다고 했다. 내가 이사 온 지 3년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렇게 오래되었는데도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물론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정신적으로 조금은 안정된 상태셨던 것 같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실 때였다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단편적인 한 모습으로 인해 아주머니가 소외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정도는 달라도, 기분이 왔다갔다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아주머니의 분노가 사그러들기를 기다려주는 건 어렵지 않다고 여겼으면 한다. 지레 겁 먹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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