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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트레바리

by 오선희

초등학생들에게는 매년 업그레이드 되는 능력이 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교과서에 나오는 것도 아니며, 이를 위한 사교육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자동 업데이트처럼 새로운 학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이 능력이 업그레이드 된다. 나는 그것을 청개구리력이라고 부르고 싶다.


요즘 나는 책 한 권을 4번에 걸쳐 천천히 읽고, 그 안에 있는 모든 내용들을 꼼꼼히 살펴보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가 아니더라도, 책에 나오는 사소한 사건들에 다 주목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동체’를 주제로 하는 책 내용에 스쳐가는 내용으로 ‘동식물’이 나오면 어떻게 생겼는지 인터넷 검색을 해 보고, 무엇과 비슷하게 생겼는지, 동물이라면 어떤 성격일 것 같은지… 등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눠보는 식이다.


그렇게 수업을 하려면, 좋은 질문이 많이 필요한데, 그 질문 중에는 다음 질문을 이끌어 내려는 목적으로 하는 질문도 있다. 예를 들어, 이웃에 대한 관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학교에서 매일 보는 친구의 얼굴에 상처가 끊이지 않고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라는 질문을 먼저 하는 것이다. 당연히 “도와줄 거예요.” 혹은 “무슨 일 있는지 물어볼 거예요.”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면 이어서 “맞아, 이렇게 우리가 관심을 주면 우리는 그 아이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아동 학대를 예방할 수도 있게 되는 거지? 이런 사회를 위해 우리가 또 관심을 주어야 하는 대상은 뭐가 있을까?”라고 또 다른 질문을 던지려고 했는데… 그랬던 거였는데, 우리 초등학생들은 첫 번째 질문부터 내 예상과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마치 내가 바라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라고 한 듯이 장난스럽게 이상한 대답을 한다.

그들의 대답은 “자기가 혼자 놀다가 다친 것일 수도 있잖아요!”, “다친 게 아니라, 원래 그런 걸 수도 있잖아요!”, “걔가 알아서 잘 하겠죠!”였다. 참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늘어놓고는 자기들은 재미있었는지 신나게 웃었다. 그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혼자 놀다가 매번 다쳐서 매일매일 얼굴에 상처가 있을 가능성은 매우 낮겠지! 그리고 혼자 놀다가 다친 것이어도 도와줄 수 있지!”라고. 그래, 너희들이 즐거웠으면 되었다 싶으면서도 사사건건 선생님의 질문을 장난으로 넘기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늘 고민이 된다. 수업 특성상 엉뚱한 대답에 정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눈치를 많이 보는 초등학교 4학년 여자아이들에게 냉랭한 태도를 보인다면 그들은 금세 풀이 죽어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입을 닫아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나누는 수업에서, 맴매를 할 수도 없고, 엄한 말투로 “생각을 말하거라”와 같이 명령할 수도 없다.


우리말에는 ‘트레바리’라는 말이 있다. ‘이유 없이 남의 말에 반대하기 좋아함, 또는 그런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는 뜻이다. 초등학생들에게는 트레바리다운 면모가 있는 것 같다. ‘틀에’ 박히지 않는 대답을 하는 것은 좋은데, ‘트레’바리 초등학생들은 종종 나를 힘들게 한다.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대화를 해 봐야 하겠지 생각하며 한 주 한 주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들의 트레바리 면모가 비판적 사고력을 지니게 도와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어느 날은 수업 시작 전에 한 주 동안 잘 지냈냐고 물었더니, 한 아이가 자신의 다친 무릎을 보여 주며 넘어졌다고 말해 주었다. 내가 찡그린 표정으로 “아이고, 어쩌다 그랬어! 아팠겠다.”라고 말했더니, 이번엔 다른 아이가 손톱 옆을 물어뜯어 피가 난 곳을 보여 주었다. “아이고, 아팠겠다. 자꾸 물어뜯으면 계속 덧나니까 그러지 마.”라고 또 말해 주었다. 그랬더니 이번엔 아까 그 아이가 이제는 희미해진 상처를 보여 주면서 몇 주 전 어찌어찌하다가 다쳤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렇게 두 아이는 경쟁적으로 자신이 다친 곳을 말해 주었다. 신이 날 일이 아닌데, 최고로 신이 난 목소리로. 그날 나는 두 아이의 다친 일화를 각각 4개씩은 들어준 후 본격적으로 수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근데 참 신기한 건, 여기서도 아이들은 트레바리였다는 거다. 자기들이 얼마나 아팠는지 알려 주려고 상처를 보여 준 거면서 내가 “아팠겠다!”라고 하면 “아닌데요! 별로 안 아팠는데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내 말에 또 반대의 뜻을 내비친 것이다. 위로를 해 줬는데, 위로를 받은 아이들의 입에서 이 위로의 필요성을 지워버리는 상황이 일어났다. 위로가 반송되어 온 상황이 멋쩍었던 나는 아이들에게 매주 지속적으로 반대를 당하는 직업을 지닌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뭐, 과정은 이러했지만, 결과적으로 아이들은, 넘어져도 괜찮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자신이 넘어지고 다친 일이 별거 아니라는, 별로 안 아팠다는 선언을 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난 오늘 끊임없는 반대의 공격에 맞서면서, 넘어져도 된다는 소중한 마음을 전달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질문법을 전략으로 잘 활용해 볼까도 생각한다. 체험학습을 간다며 설레어하는 아이들에게 “체험학습 너무 힘들겠다, 친구들도 잘 챙겨야 하고 … 선생님은 그냥 혼자 다니는 게 편할 것 같아. 어때?”라고 물어볼 예정이다. 아마 그러면 우리 반 트레바리들은 “아닌데요, 친구들하고 다니는 거 엄청 재밌어요! 저는 혼자 다니는 거 싫은데요!” 하겠지. 그러면 “오, 대단하다! 잘 다녀와!”라고 칭찬을 퍼부어 줄 준비만 하면 되겠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그때 내가 했던 질문이 의도된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나한테 속았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게 해 줘서 고맙다고 생각할까. 모르겠다, 그냥 기억이나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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