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설거지하듯이

by 오선희

사람들마다 자신들이 덜 싫어하는 집안일이 있다. 심지어는 가끔 그 집안일을 좋아하며 즐겨하기도 한다. 나에겐 그것이 바로 설거지다. 기름기가 많고, 고춧가루가 잔뜩 묻은 그릇은 그런 그릇대로 모아 두고, 뜨거운 물로 닦아내기만 해도 되는 그릇은 또 그런 그릇대로 모아 두고 나면 설거지를 시작할 준비가 완료된다. 전자를 설거지의 하드 모드라고 한다면, 후자는 설거지의 소프트 모드다. 소프트 모드로 우선 슬슬 나를 예열한 다음, 하드 모드 설거지에 돌입한다. 그릇에 거품질을 빡빡 해서 한쪽에 몰아둔 뒤, 뜨거운 물로 하나하나 헹군다. 이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은 그릇의 바닥을 닦는 순간이다. 그릇의 안쪽만큼이나 뽀드득뽀드득 소리 나게 그릇 바닥을 닦으면 기분이 참 좋다.


헹구기까지 다 끝나면 싱크대의 물기를 싹 닦아내고 행주까지 빨아 탁탁 털어내면 설거지가 마무리된다. 가끔 남편에게 설거지를 맡기곤 하는데, 그는 설거지에 대한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샛노란 카레를 싱크대에 그냥 들이부어 싱크대를 노랗게 물들인 적도 있고, 얼마나 많은 열정을 쏟아부은 것인지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싱크대 주변에 물기가 흥건해진 적도 있었다. 그러면 내 마음속 울분이 차올라, 내 눈도 분노의 눈물로 흥건해졌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스타일을 강요할 수 없으므로. 작은 것 하나하나에 맘 상하게 할 순 없으니까. 그것이 올바른 부부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그냥 내가 한 번 더 설거지를 하면 되었다. 남편에겐 다른 집안일을 일임하면 되니까 말이다. 우리말 ‘비설거지’는 ‘비가 오려고 하거나 올 때, 비에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거나 덮는 일.’을 뜻한다. 단어의 표기만 보면, 빗물에 설거지를 하는 것으로 그 뜻을 오해할 수 있는데, 실제 뜻은 그 반대인 것이 참 재미있다. 비를 맞으면 안 되는 것을 미리 치워 주는 행동이 ‘비설거지’이다.


이 ‘비설거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과도 닮아있다. 내가 사랑하는 그이가 비를 맞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비를 피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상대방이 내 기준에 맞지 않는 행동을 했다고 비난하거나, 그를 내 기준에 맞춰 바꾸려 들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상대가 힘들지 않도록 돕는 마음이 중요하다. “설거지를 왜 이따구로 했어”라든지 “설거지 마무리 똑바로 못해!”와 같은 말로 비난하기보다 내가 설거지 한 번 더 하는 게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엔 마당에다 빨래를 널곤 했는데, 잠시 외출한 사이 비라도 내리면, 윗집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 빨래를 대신 걷어주곤 했었다. 빨래 걱정에 서둘러 집에 돌아오면 우리 빨래는 출입문 근처 어딘가에 비 맞지 않게, 먼지 묻지 않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생색도 안 내셨다. 훗날 자신들도 이와 똑같은 도움을, 아니면 더 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여기셨던 것 같다. 내 불편을 조금 감수하면서 누군가가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참 귀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돌고 돌아 관계를 돈독하게 만든다.


어떻게 하면 연인이나 배우자, 가족과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살 수 있을까 궁금하다면, 그 답은 비설거지의 마음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화장품 뚜껑을 자꾸 열어 두는 게 화가 나면, 발견한 사람이 닫아 주면 되고, 화장실에 불을 끄지 않는 게 화가 나면, 내가 볼 때마다 끄면 된다. 물론 이 마음을 발견한 상대방도, 당신으로 인해 비를 맞지 않았음에, 힘들지 않았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기본이 되어야 하겠다. 생색내지 않는 사람도,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모두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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