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깊게 보았던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물잔의 넘치는 물로 베풀어라”라는 말이었는데, 그 말은 남을 돕는 것에 앞서 자신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고, 사람은 여유가 있어야 제대로 베풀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참 좋은 말이다. 그런데 내가 넘치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을까. 사람은 욕심이 끝이 없어서, 다 채워지기란, 그래서 넘치게 되기란 쉽지 않다. 내가 다 채워질 때까지 기다리다간 생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베풀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베풀고 싶을 땐, 나의 여유 저장고의 수위를 신경 쓰지 말고, 우선 나눠 주는 삶을 살고 싶다.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순간에 난 이미 많이 받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베풀면, 그에 맞는 대우를 기대하게 된다. 신경 안 쓰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내가 준 것과 상대에게 받은 것을 양쪽 저울에 올려놓고 판단한다. 내가 손해인가, 그가 손해인가를 따져보게 된다. 내가 더 준 것 같으면, 그게 못내 섭섭하고 그렇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내가 준 것보다 더 많이 받는 순간 말이다. 내가 더 많이 받았을 때는 언제라도 그 마음을 돌려 주고 싶어 기회를 엿보게 된다. 더 많이 받은 것을 우수리로 건네고 싶은데 하면서. 우리말 ‘우수리’는 ‘물건값을 제하고 거슬러 받는 잔돈’을 뜻한다. 이렇게 더 많이 받은 것을 언제가 되었든 꼭 돌려주려는 마음은 착한 마음의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
일요일에는 포천에서 열리는 오일장에 다녀왔다. 장터의 특성상 현금을 적당히 뽑아 들고, 사람들을 따라 장터 구경을 했다. 맛 좋아 보이는 손두부와 구수한 청국장, 흙투성이 세수 안 한 당근 등등 두 손 무겁게 장을 보았다. 물건값을 지불하고 우수리를 받는데, 나는 늘 그렇듯 자연스럽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순간 나는 왜 고마워 했을까, 생각했다.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은 아닌 것 같다. 불친절한 가게에서는 소심한 복수의 마음으로, “고맙습니다”와 같은 인사를 하지 않으니까.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잔돈에 고마움을 표현한 게 아니라, 좋은 상태의 물건을 건네는 마음에, 웃으며 인사해 준 친절에 고마움을 표현한 것 같다. 물건만 받아도 되는데, 친절까지 더 얹어 받았으니, 고마운 거다. 그러면 사장님은 또 생각하겠지. ‘저 손님은 돈만 주면 되는데, 뭘 고맙다고까지 하지, 사장인 내가 친절한 건 당연한 건데, 이번엔 손님이 친절을 베풀어 주었네, 내가 더 받았네.’라고. 서로 자신이 조금씩 더 받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마음을 우수리 건네듯 베풀게 되고, 모두 마음 따뜻한 하루하루를 선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구경하다가 잘못 건드려 잘 진열되어 있던 엽서를 떨어뜨렸다고 해 보자. 점원은 달려와 기꺼이 엽서를 다시 정리해 주었다. 점원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으니, 내가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또 다른 상황. 아이섀도가 깨졌고 조각난 아이섀도와 그 가루들이 함께 사용하는 일터의 바닥을 더렵혔다. 어차피 매일 청소하시는 분이 오시니까, 내가 그것들을 안 치워도 되는 걸까. 두 경우 모두 아니다. 내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니, 내가 수습해야 하고, 수습하시는 분들께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 맞다. 위에서 예를 든 경우의 주인공은 다행히도 내가 아니고, 이제는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는 것이 내가 가진 뾰족한 철칙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것이 남들에게 만만히 보일지언정 조금 더 주고 싶다. 희생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중에 우수리를 더 받고 싶어서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에는, 끝까지 책임지는 매우 큰 마음을 더. “고맙습니다”라는 말에는, 그대의 도움이 나에겐 너무 큰 선물이었음을 분명히 명확하게 명료하게 확실히 여러 번 알려 주는 노력을 더. 더 줄 거다. 걱정하고 위로하는 마음엔 눈물을 더. 같이 화내줄 땐 성대 혹사와 목에 힘줄을 더. 더 줄 거다. 그리하여 나중에 포인트 돌려받듯 우수리를 잔뜩 모아야지. 후에 내가 받게 될 우수리는 어떤 모양새일까. 아마 따뜻한 눈빛 한 번, 꼭 잡아준 손길 한 번, 문자에 찍어 주는 하트 하나일 것이다. 난 그거면 된다. 그렇게 우수리가 우수수 쌓이면, 꼭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