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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희 Feb 08. 2024

바장이다

갑자기 너무 추워졌다. 세찬 바람에 얼굴이 잘려나가는 것 같았다. 미간에 주름이 생기는 게 싫어서 웬만하면 찡그리지 않으려 하는데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에 그만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겨버렸다. 한겨울의 이동수단이라 말할 수 있는 롱패딩을 입고, 목도리를 칭칭 동여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이나마 몸의 열을 올리기 위해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종종종 왔다갔다 했다. 가만히 보니, 내 옆도 내 앞도 내 뒤도 왔다갔다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주파수가 있는 건지, 모두의 리듬감은 추위 속에서 칼군무를 가능하게 했다. 이 배경에 음악을 하나 깔아 놓아도 아주 잘 어울리겠다 싶은 생각을 했다. 조금 귀엽다는 생각도 들어 살짝 웃음이 났다.


내가, 아니 우리가 한 행동은 ‘바장이다’라는 고유어로 표현할 수 있다. ‘바장이다’는 ‘부질없이 짧은 거리를 오락가락 거닐다’라는 뜻이다. ‘바장이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아장아장’이라는 부사가 떠올랐고, 연관 검색어를 통해 ‘아장아장하다’라는 동사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장아장하다’는 ‘키가 작은 사람이나 짐승이 찬찬히 이리저리 걷다’라는 뜻이다. 버스정류장에서 바장이던 우리의 모습은 키가 작은 아이의 그 모습처럼 귀여웠으니, 아장아장하기도 했을 거다. 실제로 목도리와 패딩으로 중무장한 우리의 모습은 눈만 빼꼼히 내 놓은 펭귄 같아 보이고, 롱패딩으로 인해 보폭을 크게 할 수 없으니 종종거리는 모습 또한 펭귄 같아 보일 것이다. 아장아장 바장이는 모습으로 귀엽게 귀가에 성공했다.


승모근까지 딱딱해지는 추위를 견디다가 훈훈한 실내에 들어오면 나른해지면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겉옷만 벗은 채로 잠시 앉아 분명 호기롭게 오늘 다 마무리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일들의 데드라인을 느슨하게 다시 정해 본다. 이건 내일 오전에 마무리해도 될 것 같고, 또 이건 내일 담당자랑 연락을 해 본 후에 확실한 가이드라인이 정해지면 시작하자, 라는 식으로. 그렇게 마음껏 게을러지고, 너그러워지고 싶어진다.


그러면서 순간 너무 바장이며 살진 않았나 생각해 보았다. 앞서 말했던 ‘바장이다’라는 단어의 뜻에는 ‘부질없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굳이 내가 안 해도 될 일까지, 부질없이, 주섬주섬 챙겨 하겠다고 나서진 않았나,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미리 걱정하며 속을 끓이지는 않았나 되돌아 보게 되었다. 이렇게 늘 아등바등한 마음이 드니, 일을 잘 마무리하고 칭찬을 들어도 그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언젠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나를 미리 내다보게 되었고, 그러니 마음껏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늘 쑥스럽고 부끄러웠다. 늘 맘껏 기뻐하지 못하는 내가 싫어서,  그러면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다 보면, 한치의 아쉬움도 없이 완벽히 잘해내면 된다는 결론에 항상 도달하게 되었다. 그렇게 더 잘하려고 주어진 일에 “네, 가능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yes맨이 된 것 같았다. 바장이는 yes맨.


물론 그렇게 뭐라도 하려고 애썼던 시간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겠지만, 냉정하게 보았을 때, 지금의 내가 되는 데에 필요하지 않았던 일들도 과거에 난 하고 있었다. 그런 바장임은 이제 좀 내려 놓아도 되겠지 생각한다. 그냥 진득이 그 자리에 서 있어 보기로 한다. 바장이면 신발만 닳는 거니까. 두 다리에 힘 빡 주고 중심을 잡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해야 할 일의 데드라인을 뒤로 미루면서 중심이 약간 흐트러진 것도 같지만 오늘만 눈 감아 주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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