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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희 Feb 21. 2024

이우면 울게 되는 걸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뭔 고생을 사서까지 하나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요즘 이 말이 다시 보이고, 그 뜻이 다르게 다가온다. 그동안은, 고생을 ‘산다’는 말에 꽂혀 앞에 있는 말을 미처 보지 못했었다. 앞에는 분명 ‘젊어서’라는 말이 있었다. 젊어서 하는 고생은 사서 할 정도로 삶에 도움이 되지만, 젊지 않은 사람의 고생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잠실역 버스 승강장 앞 광장, 다들 자기 갈 길이 바빠 보이는 그곳에 연로하신 할머니 한 분이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고 계신 듯했다. 잠실역 버스 승강장은 젊은 사람들도 헤매게 되는 곳이다. 수도권으로 흩어져 가는 버스 노선이 잠실역 승강장에 대거 모이는데, 승강장의 개수가 서른 개가 넘고, 승강장 숫자가 순차적으로 붙어 있는 것도 아니며, 승강장의 위치가 종종 바뀌기도 하니, 참으로 복잡한 곳이라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출퇴근 시간이 되면 그 복잡함은 상상을 초월하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행렬이 꼬불꼬불 늘어서 있어서, 무턱대고 뒤에 가서 섰다가 앞의 사람들이 다 빠지고 나니, 내가 기다리던 버스의 승강장이 아닌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런 곳에 연로하신 할머니께서 길을 찾고 계시니, 난 또 버스 어플을 켜 들고, 나에게 질문해 주실 것을 손꼽아 기다린다.


하지만 그 할머니께서 찾으시던 것은 버스 승강장이 아니었고, 버스 노선도 아니었으며, 멀리서 걸어오는 친구분이셨다. 낯설어 하시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시면서 친구분을 만나시는 모습을, 나는 고개를 돌려가면서까지 쳐다보았다. 참 다행이다, 헤매시던 게 아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내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고 느끼는 마음은 어떤 모양일까. 저물어 가는 내 시대를 바라보며 울고 있는 건 아닐까. 40대인 나도, 갖가지 시스템들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기 버거운데, 우리 어머니, 할머니 세대의 어른들은 얼마나 힘드실까. 어플을 사용하지 못하면 병원 예약도, 버스나 기차표 예매도, 야구 경기 입장권 예매도 못하는 시대에 살면서, 과연 시스템을 잘 이용하지 않고도 사회 혜택을 누리며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오늘도 나는 복잡하기만 한 키오스크 화면 앞에서 나도 이렇게 어려운데, 어른들은 물건 구입하는 것도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곧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면, 그리고 어느 정도 내가 그 상황에 놓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시스템 속에서 헤매고 계실 어르신들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어르신들의 고생에 눈물이 맺힌다.


‘꽃이나 잎이 시들다. 점점 쇠약하여지다.’라는 뜻의 ‘이울다’에는 ‘울다’라는 말이 들어 있다. ‘이울다’라는 단어를 소리내어 읽어 보았는데, 괜스레 슬픈 마음이 들었던 이유가 있었다.


영화 <인턴>을 좋아한다. 열정이 넘치는 CEO 줄스에게 채용된 인턴 벤은 줄스의 회사가 세워지기 전 그 건물에서 전화번호부를 만들던 사람이었다. 시대가 변했고, 전화번호부가 필요없게 되자 회사는 사라졌고, 벤도 퇴직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는 다시 새롭게, 자신이 일했던 곳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줄스는 벤의 지혜로움과 성숙함에 큰 도움을 받으며 일을 잘해낸다. 이 영화에서 새롭게 도전하는 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지만, 벤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베키의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다. 경력이 오래된 사람들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리를 비워줄 줄도 알아야 청년들이 경력을 키워나갈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업무의 공간에서 시니어들이 너무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꽃도 이울고 나면 다시 피어오르듯이, 지금 잠시 울게 되더라도, 다시 일어날 중년과 노년의 삶을 응원한다. 새로운 시스템 사용법이 좀 더 직관적여지고, 새로운 것을 도전할 때 여러 번 하면서 연습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체력이 뒷받침된다면, 더욱 실질적인 응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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