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나도 갈 수 있는 거였어?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무모한 도전의 시작

by 자유영혼 깡미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 만이

자신을 묶고 있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 헤르만 헤세 -



어디로 갈지 목적지를 정했다면 주저하지 마,

네가 누구인지 상관 않고 아무 말 없이 감싸줄 테니.



끝없이 펼쳐지는 하늘의 지평선처럼

우린 끊임없이 비행하고 걸어가야만 해.

새로운 세상은 널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이 이야기를 하자면 스타벅스 아이스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 다섯 잔을 연거푸 마시면서 서글픔에 흐르는 눈물로 티슈 한통을 다 쓸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나에게 여행이란 26년 동안 제주도는커녕 대학 다닐 때 버스 타고 가는 MT가 다였어. 요즘 20대들에게 말하면 "인싸 용어야?"라고 말할법한 IMF라는 90년대 외환위기 시절, 우리 집도 아버지의 명퇴와 그 후로 계속된 사업실패로 집은 엉망이 되었지. 여행은커녕 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고, 대학은 너무나도 당연하듯 학자금 대출 노예가 되어 20대 초반부터 신불자 신세가 될뻔했어. 여느 대학생처럼 한가하게 동아리 활동이나 부어라 마셔라 술판을 벌이는 추억 쌓기는 아르바이트에 매달려있는 나에게 꿈같은 이야기였지. 방학이 되면 등록금과 생활비를 함께 벌기 위해 막노동 빼고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어. 힘들 때도 있었지만 학교를 다닐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살았고, 하루빨리 직장에 취직해서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게 내 인생 목표였거든.


여느 초년생처럼 직장에 들어가 나의 커리어를 위해 열심히 일을 배우던 시기 쯔음, 회사에서는 매년 해외로 워크숍을 가는 일정이 있었던 거야. 그게 나의 첫 해외여행이 되었던 거지. 여권을 어디서 만드는지도 모르는 서울 출신 촌년인 나에게 해외 워크숍이라니... 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었어. 이 사건을 계기로 여행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거야.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도 있잖아? 여행이 갑자기 내 인생에 훅 들어와서는 안정적인 삶을 원했던 나의 미래 따윈 개나 줘버리게 만들어 버렸지.


근데 있잖아. 이 순간부터 나를 점점 합리화시켜가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어. 고3부터 계속 해왔던 수많은 아르바이트와 사회생활들이 여행자가 되기 위한 하나의 수련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눈물 나게 개고생 했던 그 수련들이 여행을 하면서 닥치는 어려움과 위험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깡다구', 이미 알고 지낸 사이처럼 처음 만난 여행자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사회성'까지 습득했다는 합리화 말이야. 이미 나의 미래는 예견되어 있었던 거랄까? 단지 그 시기를 저울질해가면서 때를 기다렸을 뿐... 그래서 어떻게 했을 거 같아?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반년밖에 다니지 않은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왔어.


"저는 이제 더 넓은 세상과 한 몸이 되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겠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이 무작정 사표를 쓰고 비행기표를 티켓팅 했어.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곳에 가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니까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지. 즉흥적이고, 하고 싶은 일은 바로 실행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참을성 없는 내 성격 탓에 이 사단을 내고 말았던 거야.


그래서 지금 후회하냐고?


그때의 선택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으니 후회란 없어.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할 건 있지. 여행이란 놈은 갑자기 훅 들어와서 너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도 모자라 전 재산을 거덜낼 수 있는 무서운 녀석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면 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을 때 누가 이길지 이미 알고 있지? 그래도 어떤 결정을 하던 그건 온전히 너의 몫이라는 거!



놀이동산에 온 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을 짓게 만들어 주는 곳.

새로운 세상으로 떠날 때의 설렘을 온전히 느끼게 해주는 곳.

그곳을 우리는 공항이라 말하지.



기내식이 나왔다는 건

새로운 세상으로 발돋움하기 전, 잘 다녀오라는 마지막 인사 같은 그런 것.






내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가까운 사람들에게 조차 말하지 못했던 나의 '여행 준비 과정'을 말하려 해.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여행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나 같은 무모함으로 회사부터 그만두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야.


내 통장잔고는 200만 원밖에 없었고, 매달 빠져나가는 학자금 대출 상환금과 카드값으로 나의 잔고는 곧 바닥 날 지경이었어. 이럴 때만 빛을 발하는 무한 긍정 에너지...


'지금 200만 원이나 있는데 뭐, 뒷일은 다녀와서 생각하면 되지!'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깡인지 아찔하기까지 하지만 그렇게 나의 여행은 돈 없는 거지 여행자로 시작하게 되었어. 거지 여행자의 단점은 오랜 시간 동안 여행을 못한다는 거야. 첫 배낭여행은 태국에서 2주, 그다음 여행은 동남아 4개국에서 한 달, 대만 일주일, 일본 일주일... 그렇게 들어왔나 나갔다를 계속 반복했었어. 돈이 충분하게 있었다면 세계일주를 했겠지? 여행하고 들어와서는 또다시 아르바이트생으로 전락해 돈을 벌어 나가고를 반복했었어. 학자금 대출받아가며 4년제 대학을 나오면 뭐하나, 결국엔 또 아르바이트생이 되어버린 내 신세... 어떡해서든 빨리 돈을 만들어 나가고 싶은 마음에 아르바이트도 단기 아르바이트만 골라서 했었지. 안정적인 직장에서 돈을 모을 수 있을 만큼 모아 계획적으로 여행했다면 더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바로 여기야. 그러니 사표는 그만 넣어 두길 바라. 내가 피 같은 경험을 하고서 하는 말이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통장에 천만 원이 모이면 떠나버려!


돈이 모였다면 가장 싼 비행기 티켓이 있는지 확인하고 바로 예약하는 거야(이 시점에 사표를 내야 한다는 거 명심하길). 머뭇거리다가는 내면의 나와 갈등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지. 그러고 나서 가이드북이든, 세계 속으로 프로그램이든, 블로그에 빼곡하게 적어놓은 여행기든 네가 마음에 드는 정보로 계획을 짜 봐. 단, 너무 많은 계획을 세우진 말고 꼭 가야 할 곳과 꼭 먹어야 하는 음식 정도? 아, 그 나라의 현지어를 간단하게나마 공부하는 것도 아주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이것저것 많은 계획을 짜느라 쓸데없는 곳에 시간 보내지 말고 언어를 공부하는 게 훨씬 더 유익할 거라는 거지.


나의 첫 여행지는 배낭여행 초짜들이 경험하기 가장 만만한 곳, 바로 태국! 배낭여행지의 동남아 성지로 알려져 있는 이곳은 전 세계의 백패커들이 한 곳에 모이는 중심 나라이기도 해. 지금은 너무 흔해빠진 여행지 중에 하나로 전락해버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배낭여행하면 태국! 태국 하면 카오산로드를 빼놓을 수 없지!


2주 동안의 첫 배낭여행 일정은 가이드북 하나만 들고 비행기를 타는 무모함으로 시작했어. 태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는 물론이거니와 무엇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말이야. 그런데 이건 습관이더라고. 두 번째, 세 번째, 그 이후의 모든 여행 또한 준비 없이 지도와 가이드북, 그리고 스마트폰을 통한 약간의 정보만 의지한 채 여행을 이어나갔어.


지금은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스마트폰으로 여행의 모든 목적지를 미리 예약하고, 유튜브와 여행 앱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얻잖아. 하지만 10년 전 스마트폰 초기 시절(난 아이폰3GS를 사용하고 있었지), 스마트폰보다는 인터넷을 통해 더 많은 정보를 얻었지만 정작 여행지에서는 가이드북과 지도가 유일한 조언자이자 베프의 역할을 해주었지. 그때는 게스트하우스 하나하나 다 돌아다니며 빈방이 있는지, 방은 어떤 컨디션인지 확인했었고, 어디에서 지낼지 모를 궁금증에 방을 찾아 돌아다니는 일들이 힘들지만은 않았어. 요즘에는 수많은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편하게 방 가격과 컨디션을 확인할 수 있지만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를 공존하며 살아온 30대 후반의 여행자 입장에서는 전자가 더 매력적이고 스릴러 같은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는 거.


계획이 있다는 건 그만큼 여행지에서 지내는 동안 내가 딱 생각했던 것만큼을 느낄 수 있다는 거고, 계획이 없다는 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거야. 어떤 게 나은지는 네가 판단하길 바라. 계획이라는 건 있다면 좋지만, 없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고 하루살이처럼 그날 날씨와 기분에 맞게 만들면 되는 거니까!


무계획으로 시작했던 첫 여행에 대한 짜릿한 일화가 있어.


처음 태국을 방문했을 때, 난 쏭크란 축제를 경험했어. 지금은 쏭크란 축제 기간에 맞춰서 태국으로 여행 가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인데 10년 전만 해도 전혀 그렇지 않았어. 이른 아침에 도착한 카오산로드는 한적했지만 빠른 아침을 시작하는 여행자들은 블랙퍼스트를 먹으며 한가로운 아침을 즐기고 있었지. 그런데 내가 지나가자 한 백패커가 날 향해 대뜸 물총을 쏘는 거야. 난 순간 얼음이 되고 말았어.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를 상황이었거든. 근데 나 배낭여행 처음이잖아? 태국도 처음이고? 백패커랑 대면하는 것도 처음이고? 그래서 난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어. 바보같이 그저 '허허허......' 여행 온 첫날부터 백패커한테 F로 시작하는 욕을 듣고 싶지 않았거든. 그랬더니 그 백패커는 나에게 물총을 더 쏘면서,


"Happy new year!"라고 말했던 거야.


'4월에 [Happy new year]라고?'

영문도 모른 채 옷과 머리는 반쯤 젖어서는 짐을 풀 곳인 게스트하우스만 어깨 빠지게 찾아다녔어. 무계획으로 갔으니 내가 간 날이 태국의 새해 인지도 몰랐고, 쏭크란 축제는 더더욱 몰랐던 거야. 알고 갔더라면 그저 신나게 즐겼겠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갔을 땐 미친 듯이 즐기게 돼있어. 그 희열이란 경험자만이 알 수 있는 보물 같은 순간의 기억이라는 거! 그렇게 삼일 동안 방콕과 파타야에서 원 없이 쏭크란 축제를 즐겼어. 다시는 태국을 가지 않아도 이 순간의 기억을 평생 간직할 수 있을 만큼 말이야.



스마트폰 지도 앱보다 종이 지도가 나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던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를 함께 경험한 평범하고도 특별한 여행자.



카오산 로드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겨주는

빨간 머리 피에로 아저씨의 '싸와티캅'


나도

"싸와디캅"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카오산 로드의 메인 스트리트.

지금도 여전하지?



낮보다 밤이 더 화려한 여행자의 천국 카오산 로드.

오늘은 어떤 여행자가 어떤 공연을 펼치고 있을까?



방콕 씨암 역에서 카오산 로드로 향하는 15번 로컬 버스.

우리나라 버스처럼 친절하게 정류장 방송을 해줄 턱이 없는 방콕 로컬 버스지만

눈 감고도 언제,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알고 있는 방콕 현지인이 되어버린 나.



무더운 태국의 새해를 건강하게 지내라는 의미로 얼굴에 진흙을 묻히는 쏭크란 축제의 모습.



현지인과 여행자를 가리지 않고 길거리, 오토바이, 자동차, 트럭에서 무작정 물대포를 쏘는 파타야의 쏭크란 축제 모습



그 후로 난 태국을 3번이나 더 여행하게 되었고, 방콕 씨암 역에서 15번 버스를 타면 카오산로드로 곧장 가는 길을 눈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정도의 방콕 현지인이 되어있었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