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연 1화
소설을 쓴지 15년이 넘었다. 아주 어릴 때 쓰던 토막토막의 이야기들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소설을 쓴다고 '인식'한 것은 분명히 15년이 넘었다. 어릴 때 내가 쓰던 소설들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마지막에는 직접 목숨을 끊는다는 점이었다. 글의 구성을 간략화하면 다음과 같다.
여성이 등장함 -> 이 여성은 차분하고 순응적인 성격을 가졌음 -> 이 여성이 범죄를 당하거나, 가족에게 버려지거나, 친구에게 배신당하는 등의 일을 겪음 -> 트라우마가 됨 -> 누군가를 만나 트라우마가 치유되는 듯 보임 -> 그러나 결국 자살함
내가 쓴 소설 중에 완결이 난 소설들은 거의 다 이런 식이었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을 열심히 학습한사람처럼 내 소설은 항상 주인공을 소개하다가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 긴장이 고조되고, 그 긴장이 해결되는 듯 하다가는 주인공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버리면서 갈등을 해소시키는 패턴을 따라갔다. 이렇게 길게 썼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불행한 여자 서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성이 어떤 일을 겪고 얼마나 불행한지에 대해 몇 십 페이지를 들여가며 열심히 썼고, 실제로 어떤 일을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이런 일을 겪으면 반드시 불행해질 거라는 어떤 확신에 차 있었다. 그렇게 시야가 어두웠던 것은, 내 눈앞이 실제로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즉, 내가 불행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이 너무 불행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어째서 불행한지, 무엇이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지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한 상태였고 소설 주인공을 불행하게 만듦으로서 우회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소설 뿐만 아니라 시도 썼지만 시도 마찬가지였다. 시도 온통 불행한 여자들이 어떻게 불행을 이겨내려다 좌절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 뿐이었다.
그러나 내 문학 세계가 빈곤해진 것과는 별개로, 이와 같이 불행한 여자들의 서사는 나를 살렸다. 우울증을 앓고 있었으면서도 병원에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아니 우울증임을 인지하지조차 못했던 나 대신에 내 글 속 불행한 여성들은 마음껏 불행을 겪었다. 마음껏 겪은 그 여성들은 극단적인 방법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불행에 대처하는 요령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불행을 불행이라고 명명할 자유조차 갖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내 글 속의 불행한 여성들은 그때의 나보다 훨씬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고 보면 재미있는 것은 자신이 우울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항상 행복한 주인공만 등장시키는 작가가 있는 반면, 나처럼 마찬가지로 불행한 주인공만 등장시키는 작가도 있다는 것이다. 항상 행복한 주인공만 등장시키는 글쓴이의 마음은 잘 모르겠지만, 내 심정에 대해서는 좀 알겠는 바가 있는데 극단적으로 말하면 '메리 수' 같은 것이다. 주인공에 자신을 지나치게 이입하고, 그 주인공의 상태를 변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상태를 좌지우지하려고 하는 버릇. 글을 쓸 때 아주 안 좋은 버릇이지만 어릴 때의 나는 그런 것을 메타적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나의 우울함, 힘겨움, 고통에 대해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불행한 여자 서사를 그만 쓰기로 마음먹었다. 내 글이 지나치게 단순해지고 있었다.
대신 나는 사람의 감정이 단지 절망이나 고통 뿐만 아니라 훨씬 더 풍부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사람은 외로울 수도, 자존심이 상할 수도, 실망할 수도, 허전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뒤로부터 내 작품 속 불행한 여자들은, 살아 움직이는 여자가 되었다. 곧 닥쳐올 죽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여자들이 아니라, 담배든 뭐든 손에 들고 어떠한 좌절을, 어둠을 비스듬히 바라볼 수 있는 여자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