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연 16화
글 쓰는 것은 나의 오랜 취미이자, 때로는 직업이었고, 때로는 지독하게 외로운 사랑이었다.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온갖 궁리를 해봤지만 그다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한 내게 글 쓰는 일을 전업으로 할 기회 따윈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히려 좋았는지도 모른다. 직업이 된 수많은 취미들이 곧잘 변질되거나 더 이상 예전의 그 느낌이 아니게 되고는 하는데, 내겐 그럴 일이 없었으니까. 나는 괴로울 때 글을 썼고, 마음이 정리되지 않을 때 글을 썼고, 마냥 설레어 잠 못 드는 날에도 글을 썼다. 때로는 수신인이 있었고, 때로는 누구도 읽지 못할 곳에 글을 썼다. 글을 쓰는 것은 내 일상과 동치되었다. '작가'라고 스스로를 칭하기에는 여러모로 부끄럽지만, 스스로를 글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나는 글을 쓸 때 가장 나다워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내가 나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없게 될 때 나는 갑자기 글을 쓰지 못한다. 예전에 친구에게 '손을 떼지 못한다'고 설명한 적이 있었는데, 글의 첫 문장조차 쓰지를 못하는 것이다. 첫 문장은커녕 제목이나 첫 단어도 쓰지 못한다. 분명히 쓰고 싶은 것들은 마음을 맴도는데 쓰지 못한다. 그럴 때 나는 꼭 입이 막힌 사람 같다. 아니, 소리조차 지를 수 없게 목이 졸린 사람 같다. 목을 쥔 손을 풀어내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그 손은 내 손이기 때문이다.
글을 '잘 쓰지 못한 적'이야 아주 많았지만, 글을 '쓸 수 없다'고 느낀 것은 우울증이 극심할 때였다. 그때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평가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고, 그런 상황에 놓인 데다가 심지어 매우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최악의 결과를 맞고 끝날 것이었다. 거기쯤에 생각이 도달하자 나는 일상의 모든 순간에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모든 시간이 낭비 같았고 나는 가치 없는 사람 같았고 곧 쓰레기처럼 버려질 운명 같았다. 분명히 열심히 했고 최선을 다 했는데 결과는 계속 좋지 않았고 나쁜 평가가 쏟아졌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나는 갑자기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글을 쓰는 게 무서웠다. 누군가에게 나를 드러내는 게 끔찍했다.
마치 폭설이 쏟아지는 엄동설한에 홑겹 잠옷만 입고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 전까지는 분명히 외투를 입고 있는 기분이었다면, 어느 순간부터 나는 외투도 벗겨지고 신발도 빼앗겨, 맨발에 살이 다 비치는 잠옷 차림으로 겨울 바람 속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집에 들어와서 문을 닫아거는 게 유일한 해답일 것이었다. 나는 그 해답을 택했다. 마음의 문을 닫아 걸었다. 즉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나는 내 언어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언어가 없는 사람이 된 기분. 그래서 마냥 노래만 들었다. 다른 사람이 짜맞춘 언어를 듣고 있으면 내가 언어를 가졌던 시절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
그즈음 나는 말도 잃었다. 원래도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더 말수가 적은 사람이 되었다. 힘들어서 말할 기력이 없다고 설명했지만 사실은 내가 하는 말조차 어딘가 한참 부족하게 느껴져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놓고 한참 추상적으로 설명하길 좋아하는 버릇도 없어졌다. 내가 점점 내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을 읽지 못하게 되었다. 책 속 인물들이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언어를 잃어가는데 책 속에 나오는 이들은 모두 자기 말을 갖고 있었다.
타와다 요코의 <목욕탕>이란 소설이 있다. 소설 속 화자는 독일에 사는 일본인인데 일본어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한다. 그 과정에서 화자는 글로만 배울 수 없는 독일어들을 애인에게 배우는데, 애인이 설명해주는 그대로만 언어를 익히는 체험을 하며 자신이 스스로 말할 능력을 잃어 간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나 역시도 비슷했다. 내가 뱉어내는 모든 말이 '틀린 것'이라는 평가를 받자, 나는 점점 아무것도 밖으로 꺼내 들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그래서 도피했다. 평가를 받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그러자 글을 다시 쓸 수 있게 되기 시작했다. 첫 문장을 쓸 수 있었고, 이어서 두 문장을 쓸 수 있었고, 한 문단도 완성할 수 있었다. 빼앗긴 언어를 다시 되찾았다. 무사히 글 쓰는 힘을 회복했지만, 그때부터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내가 나 자신이 아니게 된다면, 글을 쓸 수 없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도피 외에 또 어떤 길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