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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eongrim Amy Kang Jul 04. 2022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격동의 20세, 나는 홀로 난생처음 엄마와 동생과 떨어져 상하이에서 홀로 생활을 했다. 

내가 왠간히도 꿈꿔왔던 명문대를 합격했다, 덜컥은 절대 아니었고, 내가 정말 1년간 무수히 머리에 쥐 나게 고생한 결과였다. 그리고 굉장히 뿌듯함과 동시에 들어온 어마 무시한 공포는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후덥지근한 여름날 (해외 학교는 9월의 첫 학기가 시작한다.) 이상한 냄새나는 택시에 내 몸과 나의 이민가방을 태우고, 백팩에 찌들어가는 나의 땀에 쩌든 등과, 손에 바들바들 떨면서도 들고 있던 입학 합격증과, 기숙사 등록확인증의 꾸깃함이 나의 패닉을 설명했다.


그리고 들어간 후덥지근하지만 또 굉장히 아담한 나의 1인 기숙사실은 나에게 엄청난 현실감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에게, 옆에 나를 따라 들어온 내 동생에게, 틈만 나면, 나에게 틈보이던 친구와, 단짝들에게 징징 대었다. 나를 좀 알아달라고. 내가 이렇게나 힘들다고.


아주 당당히 내가 힘들고, 공포스럽고, 그로 인해서 망가지는 나의 얼굴과, 그 얼굴에서 흘러내려오는 공포의 눈물 그리고 땀을 고스란히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렇게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보여줘야만이 그들이 나를 봐줄 것이고, 나는 나도 나 자신을 안 보는 지금 이 시점, 내가 나 자신을 17층 1인 기숙사에서 던지지 않을 그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말 안 듣고, 굉장히 철없으면서도 짜증 나게 나를 이용해먹던 내 장거리 첫사랑도 한 몫했다. 




나는 그렇게 엄마와 동생, 주변에 나의 말을 들어주는 모든 이들을 이용했다. 그들이 그걸 이용해 내 뒤에 화살을 꽂더라도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해야 좀 살 것 같아서, 그렇게 하면 나를 살게 해 줄 것 같아서.


그리고 지금 위아래 다시 격동 치는 30세.
나는 정말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정말 보이고 싶지 않다. 이게 얼마나 사람을 진절머리 치게 하는지 나는 10년의 습관적인 자기 파괴적인 행동과 나쁜 습관들로 물들여온 부정적인 경험으로 인해 잘,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첫째, 이딴 모습을 장착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다. 또 위로도, 건설적인 회답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내 에너지, 내 슬픔, 내 시간을 들여서 이딴 모습을 남에게 , 그것도 가족도 아니고, 피도 안 섞인 남에게 보여봤자 정말 아무런 Feedback도, 해답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만큼 그렇게 낭비하는 습관도 없으며, 창피한 짓거리도 없다. 


둘째, 철이 들었다면, 제대로 된 어른이 되었다면, 내가 이런 모습을 하고 내 사랑하는 이들을 찾아갔을 때 그들이 얼마나 가슴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답을 주고 싶지만 답을 줄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증오하고 싫어할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알았다. 내가 한번 울고불고할 때 우리 엄마는 얼마나 가슴에서 전화 너머로 피눈물을 지었을지. 그리고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는 내 옆에 저 아이의 눈에서는 절망이 비친다. 

그걸 보고 있는 나는, 나 자신이 그렇게 짐, Burden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자식도, 부모도 아닌 이에게, 짐이라고 느껴지는 이 감정은, 사람을 살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원인 중하나라고 본다.




나는 하루에 달력에 스케줄을 빼곡히 쓰고, 순서를 정리하고, 그것도 안돼, 컴퓨터 Notion에도 빼곡히 스케줄과 할 일을 적어내고, 정말이지 열심히도 이런 모습 자체를 내 안에서 끄집어내지 않기 위해서 무단히도 노력한다, 노력했다. 


우울증, 공황, 불안이라는 것이 이래서 무서운 것이다. 


노력한다고 되지 않게 만든다, 노력한다고 나오지 않아야 할 것들이 덜 나오지 않고, 안 나오지 않는다. 

약으로 노력을 만든다, 그리고 카운슬링으로 그 노력을 좀 더 갈고 닦는다. 


그렇다고 그 노력이 항상 빛을 발하지는 않는다. 발하는 그 빛도 언젠가 나의 이 끔찍한 어둠으로 가려버린다 아주 꼼꼼히, 지하 셋방에 꼼꼼히 붙여놓은 검정 Ducktape 같이.


그렇게 되면, 나는 어쩔 수 없는 감정으로 또 울컥울컥, 그리고 주변인을 힘들게 할 슬픔을 터트린다. 그리고 미친 듯이 운다. 아마 지난주 포함 거의 보름 정도를 2일 빼고 내내 한 번씩은 울었을 것이다. 

내 옆의 저 아이는 나에게 너는 짐이 아니라고, 너는 너를 모르고 나와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너를 다 알고 만났고, 결혼을 약속했고, 앞으로도 다 알고도 너 옆에 있을 거라고 해주었다. 


저 말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 없었으며 또 슬픔을 지나 절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왜 이 행복하고 행복할 수 있는 Individual이 나로 인해 나라는 사람의 검정을 다 알고, 그걸 이해하면서 그 검정을 느끼면서 살아야 하지.


저 아이가 나를 죽어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감정과, 내가 행복해하려, 바꾸려 하지 않으면, 언젠간 내가 저 아이를 절망으로 같이 빠뜨릴 수 있겠구나 하는 그 조바심은 인간이 소화하기엔 너무 감당 안될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한다. 


저 아이도, 다른 기타 등등의 사람들도 나에게 한소리를 한다, 심지어 우리 엄마도

배가 불렀느냐, 지금 길거리에 나가보면 머리 위에 지붕 하나 없이 살아가는 이들과, 당장 내일 먹을 3파운드 자리 점심을 어디서 얻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을 보고도, 너는 그런 생각을 하느냐 한다. 

배 불렀다고, 행복이 뭐냐고, 너는 배불러 행복을 찾지 않으려는 거라고.
게으른 거라고.




도대체 왜일까? 왜 나를, 저기 저 길거리에서 어떤 사연과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는지 절대 모를 사람들과 비교하는 것일까? 정말 간단한 이유로, 내 손톱 밑의 가시가, 저기 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던 예수의 아픔보다 더 심각할 수 있는데. 


세상에 아픔과, 슬픔 중에 절대적으로 누가누가 더 아프고 누가 덜 아픈지에 대한 절대적인 수치가 있을까.

그렇다면, 정말 그 수치를 따라가고 싶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가슴 아픔"과 힘듦을 어떻게 해서라도 덜 느끼고 싶다. 


내가 느끼는 것이 무한대인데, 그 누군가가 내 절대적인 수치와 절대적인 기준치른 통해서 재보면 너의 그것은 고작 2밖에 안 된다고 한다면, 나는 이 세상 어떤 신앙, 신념보다 더 잘 믿을 수 있을 자신이 있다. 그 신앙과 신념이 나에게 범죄를 저지르라고 해도, 그 힘듦을 덜 느낄 수 만 있다면. 


가톨릭, 크리스천, 불교 신앙은 다 믿어봤고, 소용없다. 


그 무엇이든 하겠다, 이 힘듦을 덜 느낄 수 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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