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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eongrim Amy Kang Sep 02. 2022

불안에 쩌들면서도 살아야 하는, 나의 멘털 일지 16

08.31


아니 벌써?라고 말하기도 이제 지겹다.


그렇다 9월이다.


더워 x 지겠다고 살려달라고, 이놈의 영국 집, 카펫 정말 다 진절머리가 난다고 정말 울고불고했던 때가 엊그제였다. 그리고 엄카 찬스로 Shark청소기를 구매한 뒤 한층 10배는 더 나아진 나의 삶의 질 그리고 폐의 질을 음미하며 살아간지도 정말 두 손으로 꼽을 수도 없게 며칠 되지 않았는 데에도 이렇게 날씨가 갑자기 또 쌀쌀해졌다.


메일에는 회사 백그라운드 체크를 하라는 이메일 외에, 어김없는 브랜드들의 22fw! new! brand new! 마케팅 메일이 수두룩하게 쌓여있다.


회사 오퍼를 받고, 계약서에 나의 여권 이름 풀네임을 적어 너 은지 얼마 되지 않아, 백그라운드 체크를 시작했다. 내가 진짜 이 이름이 맞는 그 사람이 맞는지와, 나의 학사학위는 진짜인지 나의 이전 working experience의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프로세스이다.


정. 말. 쓸. 데. 없는 짓거리이다.


Reference check가 제일 쓸데가 없는데, 무려 자기가 일전에 일했던 회사에 연락해, 다른 걸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이 사람이 여기서 일한 게 맞냐는 yes/no답변을 들으려고 사람을 긁는 프로세스이다.


법적으로 다른 것을 물을 수가 없단다. 이 사람이 정말 일을 "잘"했는지 아니면 못된 짓을 하고 나갔는지 범죄행위를 저질렀는지 등등의 질문은 물을 수 없고, 그저 이 사람이 이때 이 시기에 이 타이틀을 가지고 일을 했는지 안 했는지를 묻는 거라는데, 그 ex상사는 이 사람에 대해서 나쁘게도 좋게도 말할 수가 없다고 한다.


뭐 이딴 걸 한다고 사람을 몇 주일씩이나 (다행히도 나는 1주일 만에 통과...) 붙잡아두고 들들 볶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내 프로세스가 상당 빠른 탓에, 내가 first day가 2주나 빨라졌다. 9월 말에는 돼야 갈 줄 알았건만, 다음 주에는 출근이다.


아 손 떨리고 가슴 떨리고 머리 아프다.

3년 만의 offline회사생활이란.

어떨까


기절하지 말아야지.



09.01


대니와 대판은 아니고 중 (中) 판 싸웠다.

말로.


정말 뜬금없이 서로 잠자기 직전 잘 자라고 얘기하는 와중이었고 내일을 뭐하니 뭐할 거니 그런 이야기를 시답지 않게 나누고 있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이야기가 번졌는지 알게 모르게, 


왜 너는 아직도 모든 게 불만이고, 행복하지 않고, 슬프고, 짜증 나는 거야?


로 번졌다. 그리고 나는 굉장히 방어적으로 돌변했다.

굉장히 짜증 났다.


나를 다 안다고 했던 놈이 갑자기 저렇게 나오니 뭔가 저 인간이 나를 모르고 결혼했나, 지금까지 뭘 모르고 결혼한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인즉슨,  그렇게 피 땀 눈물을 흘려가며 4달여간을 열심히 뒤지고 판결과 내가 좋아하는 조건의 포지션으로 회사 이직에 성공을 했는데, Offer 받을 당시에 5분간 기뻐 설치고 난리이다가 갑자기 다시 급 우울모드로 바뀌어, 그 모드가 현재까지도 계속이라는 것이 저 아이의 불만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나는 네가 뭘 알 아를 시전 했고, 나중에는 너 이런 거 모르고 결혼했니를 쏘았다. 그렇게 서로 잠잠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을 청했다.


잠들기 전에 온갖 생각과 화로 가득 차 뭐라고 말해야 저 인간이 알아먹을까를 생각하느라 내 뇌에 지진이 생겼다, 그렇게 잠들기는 포기했다. 


그리고 다음날, 서로 뚱한 채로 있다가 이런 유의 일에는 언제나 그렇듯 대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러냐고. 


저인 간의 왜 그러냐는 굉장히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어제의 머리와 오늘의 머리를 굴려가며, 설명했다. 그리고 오늘의 머리에서 나온 카운슬러 선생님이 얘기해주셨던 그 가르침을 저 아이에게도 전도했다. 


너는 내가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은 항상 불안의 연속이었다고, 10분 평화롭다, 아버지가 짜증이 나는 일이 있으면 우리는 거기에 맞추느라 살얼음을 걸어야 했는데, 그 평화롭고 조용하면서, 행복한 분위기가 체 10분이 가지 않았다고, 너무 조용해도 조용하다고 언제 불같이 화내고, 집안 가구가 깨질까 고민해야 했고, 시끄러우면 시끄러운 대로 언제 저 지 X이 끝날까, 평화롭게 언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를 몇 시간 내내 고민했고 덜덜 떨었다고.


너는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냐고. 

미안하지만 너는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고, 나는 있다고. 

당장 지금 이 offer와 employment confirmation의 행복한 기운을 내 몸을 몇 달이고 맴돌게 내버려 두게 하기엔 나의 트라우마가 아직도 크고, 나는 이 앞날을 걱정해야 한다고.


당장 닥칠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백그라운드 체크와, 다 끝난 후의 온보딩, 그리고 미국으로의 비즈니스 출장까지 온갖 것이 2주 안에 휘몰아치듯이 벌어지는데 그걸 생각 안 하고 닥치면 닥치는 대로 살기엔 내 "경험"이 나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그렇게 나는 나의 얘기를 했다. 드디어 답변을 찾은 느낌이었다.


물론 저위의 답변들이 나의 영원한 정당한 근거들이 될 수는 없다. 그러기엔 나는 야망이 크다. 성공하고 싶은.

성공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행. 복. 하게 살아가려면, 저렇게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신뢰와, 나도 행복할 수 있고, 나를 신뢰해도 상관없으며, 이런 행복도 오래 길게 아무 일도 없이 갈 수 있다는 그런 믿음은 굉장한 시간이 걸린다.

18년간 쌓아왔던 부정적인 경험을 씻어내기엔 이 4년간의 생활은 아직 부족하다.


닥치면 닥치는 대로, 현재를 살기.

2023년의 목표가 되시겠다.


"현재를 살기" 굉장히 닭살 돋고 살짝 토가 비치는 문장에,
현재만 살아? 현재 +1분 뒤는? 그럼 1달 1년 뒤는? 뭐할라고.


의 chaos 가 나를 휘감지만, 그래도 계속될 때까지 나를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다.



09.02


no where and everywhere is my home.


무념무상으로 틱톡을 스크롤링하다 걸려든 비디오에서 발견했다.

그 박수무당이 3년 전 나에게 역마살이 있고, 너는 중국에서 있으면 안 된다고 할 때, 여기가 얼마나 편하고 좋은데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저건.


무당님, 맞는 것 같아요.


심지어 역마살의 대표 동물이라는 말도 내 몸에 새겼다.

나는 역마살이다.


그렇게 18년의 지옥 같은 한국생활을 끝내고, 나는 무작정 중국으로 건너갔고, 열공을 한끝에 명문대를 득템 했다. 그렇게 다시 Semi지옥 같은 대학생활을 끝내고 다들 무작정 자기 나라로 돌아갈 때, 도대체 한국이 뭐가 좋다고 저렇게 돌아가지 못해 안달일까를 생각하며, 조용히 중국에 남았다.


직장인으로 자리를 잡고, 신경쇠약 걸릴 것 같은 중국의 비자행정업무를 5년이나 달달 볶인 뒤, 코비드라는 말도 안 되는 범세계적인 사태로 중국을 어쩔 수 없이 떠났다.


그리고 지금 여기 영국에서 나는 다른 삶을 또 산다.


대학생 때 평생 친구라고 믿었던 그 친구 한 명은 점차 말을 줄여나갔고, Whatsapp에서 몇 번 인사를 물었던 것이 전부다. 그나마 중국 직장생활에서 연결되었던 직장동료인데 친구나 동료라고 하기엔 멀면서도 굉장히 가까운 언니 한 명과 카톡에서 결혼생활과 가끔 한국 나가면 꼭 보는 정도다. 


그렇게 나는 어디에도 "찐친"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가끔 homesick이라는 것을 겪는다. 물론 100% 음식에 관한 경우다.

그런데 정말 가끔, 음식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것이 있다.


사람.


초중등 시절 모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은따같은 걸 당했고, 여고 때는 정말 치가 떨리는 왕따 경험을 겪었어서, 나는 그리운 사람이라고는 없다.

심지어 나를 이뻐라 해주셨던 고등학생 때 (정말 저 이쁨은 도움 안 되는 이쁨이었다.) 선생님들도 떠올려보라면, 다시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럼 하찮은 어른들인데. 빽빽이 가득 찬, 허여 멀 건한 백인종들을 내 주변에서 보고 있자니, 나는 여기에 속해있는 자가 맞나.


지금 시대가 어느뗀데!라고는 하지만 역시 사람들은 끼리끼리 아닌가.

라는 허접한 생각으로 나를 가득 채우곤, 우울해진다.


항상 Comfort zone이라는 것을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눈 질끈 감고 나가는 가족모임, 그곳에서 말하려고 생각해두는 여러 가지 버전의 Small Talk들... 

이 모든 것이 나를 지치게 하고 나중에는 homesick으로 번진다.


이곳이 낯선 외국 타지가 나의 HOME이라는 걸 깨닫게 됨과 동시에, 다른 이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고, 몇십 년간 생활해온 그곳을 HOME이라고 하면서 편하게 사는데 이건 좀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으로 나를 또 화나게 한다.


화나고 우울한 마음으로 다시 돌아갈까를 수십 번 생각하지만, 

어딜 돌아가야 하나? 

라는 질문이 나를 막는다. 그 돌아가고 싶은 그곳이 어디인가. 정말 돌아간다고 해서 "돌아갈 수" 있나?


나의 한국 home은 더 이상 나의 집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금세 저 틱톡에서 말했던 Nowhere and everywhere is my home을 깨닫고 내가 있는 이곳에서 내 삶을 산다.


이런 기분은 내 전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살면, 아니 9할 이상을 살게 되면 없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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