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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의미 있는 이유

사랑이 전부다.

by 싱클레어

누군가가 말했다.


"넌 사랑 타령만 하는 것 같아. 사랑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브런치의 글들을 봐도 사랑에 관련된 글들이 대부분이다. 아마 '사랑'에 목말랐기에, 아니 '사랑'을 맛보았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마치 한 번 맛본 사람은 끊을 수 없는 아이스크림처럼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사랑이 밥 먹여 주더냐?"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랑이 전부다. 밥도 먹여 주고, 살아갈 힘도 준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사랑이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말해 보겠다. 매일 수백 권이 넘는 자기 계발서가 출판된다. 각자만의 성공 비결을 가지고 있기에, 저자의 말대로 하면 나도 그 사람처럼 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어 열정이 급상승하는 자신의 모습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방법을 따라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경험하다시피 삼일을 못 가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게 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나는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한 걸까?" 하며 자책을 하게 된다.


오랜 숙고 끝에 문제는 의지가 약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자신을 귀중하고,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만약 자신을 귀하고, 소중하고, 사랑하고 있다면 자신의 시간을 자신의 성장을 위해 사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시간을 자신의 발전을 사용했을 때 멋진 미래의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즐거운 일 혹은 취미를 먼저 하는 자신과 노력에 따라오는 고통을 회피하려고 여러 가지 이유를 만들어 내는 자신의 모습을 종종 발견한다.


사랑은 모호한 말이지만, 사랑의 결과는 한 사람을 살아있게 만든다. 살아 있다는 의미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의 성장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현재의 상황이 좋지 않아도, 그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에게 "너는 귀하다, 너는 소중하다. 너는 사랑받는 존재다"라는 의미 부여를 하기에 노력을 할 수 있고, 노력할 때 따라오는 고통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관계적인 면에서도, 나 자신이 소중하기에, 나와 관계 맺은 사람들도 소중한 사람이라서 상대방이 실수를 하더라도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뛰어넘어 다시 좋은 관계를 바꾸도록 노력할 동기를 얻을 수 있고, 또 관계의 불편함을 참을 수 있는 인내심도 함께 얻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사랑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동기와 고통을 참을 수 있는 인내심, 그리고 좋은 관계를 맺도록 만들기에,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삶에서 가장 근원적인 힘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배운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아니 배워야 한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막연히 사랑은 가슴 뛰는 것, 혹은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줄 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책을 읽음으로써 깨달은 것은 '사랑'은 배워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한국 사회를 봤을 때, 6.25 한국 전쟁과 민주화와 산업화 시기의 혼란으로 인해 부모님 세대는 먹고, 사는 것에 최선을 다해 살아와서, 그 이외의 가족관계나 자식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반면에 북미 사람들을 보면 부모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이들의 발표회, 졸업식, 혹은 야구 시합 등이 있을 때는 함께 가서 응원해 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즉, 중요한 순간에 함께 있어주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며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자신들에게 발표회 혹은 야구 시합은 중요한 일이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사회 속에서 자신을 자각하는 시간이며, 때론 상처 입기 쉬운 시간이다. 이때 가족들이 힘내라고 응원해주고, 격려해 준다면 어떨까? 비록 실수를 하더라도, 가족들이 함께 감당하기에 그 실수가 작게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의 부모님이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부모님 세대에서는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물질적인 측면에서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관계적 측면에서 사랑을 놓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점에서,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할 만큼 사랑받지 못했다. 어린 시절은 이렇다 쳐도, 어른되고 나서는 자신에 대한 부족한 사랑이 채워지는 것보다 사랑이 고갈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온갖 평가와 판단하는 말에 시달리면서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쌓여만 간다. 그러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순간은 다른 사람이 된다. 없던 시간도 생기고, 사랑을 얻기 위해 온갖 고통을 감수하면서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다 사랑을 서로 확인하고 사랑하게 되면 마치 슈퍼맨처럼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모든 일이 잘될 것 같고, 어려운 상황과 고통들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생긴다. 이는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그를 사랑함으로써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노력이 필요한 일을 고통을 참아가면서 할 동기를 부여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누군가의 사랑의 근원이 말랐을 때는 어떻게 할까? 혹은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이 곁에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이 최선일 것이다. 그래서 가끔씩 의기소침해질 때, 무기력할 때, 관계 때문에 괴로울 때,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도, 나는 나를 사랑한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힘이 난다. 나는 사랑받는 존재이니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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