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하버트 조지 웰스의 '타임머신'
하버트 조지 웰스의 '타임머신'은 1895년에 출판되었다. 자신의 서평에서 밝혔듯이, 저자가 이 책을 쓴 동기는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당시 저널리스트로서 신문에 원고를 기고하고, 원고료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던 저자는 발행되지 않은 원고들이 밀려 있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 책이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강점은 바로 '타임머신'이라는 독창적인 아이디어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책은 전세계로 퍼져나가 책과 영화 등 SF장르를 개척하게 만드는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어릴적부터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거나, 아니면 과거로 가든지 누구나 한번쯤은 상상하거나 이야기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이다. 그 만큼 '타임머신'이란 아이디어는 매력적이다. 이 글에서는 웰스의 '타임머신'을 읽고,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 나 자신을 만나서 나 자신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줄거리
웰스는 이 책이 출판되고 나서 36년후에 쓴 자신의 서평에서 이 책이 불완전한 책이라고 스스로 고백한다. 그는 이 책의 초반부는 세심하게 계획을 하고 썼지만, 후반부는 급하게 썼기 때문에 아주 빈약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이 책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3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서술자는 시간여행자의 집에 초대를 받아 참석한다. 시간여행자가 자신이 개발한 '타임머신'이란 모형을 보여주고, 실물로 만든 자신의 타임머신으로 미래 802,701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고 돌아와서 들려준 이야기와 다시 시간여행을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결론 맺는다.
저자는 그 당시의 세상을 지배층과 하층 노동계급의 이분법적인 계급사회로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의 생각은 80만 년 후의 인류의 모습을 엘로이(Eloi)족과 몰록(Morlocks)족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타나게 된 배경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생활환경이 극도로 진화되고, 안정화 되어지게 된다. 더이상 생활을 위한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지배층은 발전을 위해 쓸 지성이 퇴화해서 새로운 것에 대한 지적 관심이 거의 없는 존재로, 평화롭게 먹고 자는 현재만을 누리는 지배층의 후손 집단인 엘로이족이 되었다. 그리고 몰록족은 하층계급으로 지하에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살아가다 지성이 퇴화되어 버린 지배층의 후손이자 손쉬운 먹이감인 엘로이족을 잡아먹게 된다.
80만 년 후의 세상을 인류의 퇴화된 두 부족의 모습으로 묘사한 것을 보면, 저자는 인류의 미래가 밝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가 지배층의 군림이며, 또 하층계급의 폭력성이 그렇게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그 당시의 19세기 시대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타임머신으로 미래에 갔더니 이런 모습이었더라. 지배층들에게 자신들이 누리는 부로 인해 나태해지지 말고, 하층계급들이 느끼는 고통에 참여해서 부를 나누라고 충고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미래의 모습이 상류계급과 하급계급으로 나뉜 이분법적인 시각에 묶여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책의 시간여행자는 미래로 갔지만, 저자는 좀 더 창의적으로 미래를 그려 볼 법도 한데 이렇게 미래를 묘사한 것을 보면 미래로 시간여행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저자가 언급했듯이 '타임머신'이란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면 이 책은 지금까지 살아남았을까?
타임머신은 내가 원하는 미래 혹은 과거의 특정 시간과 공간에 갈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을 극복한다. 따라서 시간을 초월한 인류의 진화를 보여주는 '타임머신'은 독창적이고 아주 매력적인 기계이다. 20세기와 21세기를 거쳐 인간은 보이저 1,2호처럼 태양계를 촬영하고, 그 너머로 인간이 만든 기계를 보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2020년대에는 화성에 인류가 첫 발을 내딛는 모습을 우리는 목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앞으로의 미래를 예상해보더라도 타임머신은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과학자들은 말한다. 즉, 시간여행은 인류가 극복하지 못하는 도전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생물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일직선상에서만 살아가도록 한정 지어졌다고 생각해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리 많은 권력과 기술과 돈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것을 어길 수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번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타임머신은 마치 전능한 신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한 매력을 선사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만약 타임머신이 있다면 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다. 우선 과거로 돌아가 공룡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멸망했는지, 포유류는 어떻게 진화했는지, 인류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언어와 문화는 어떻게 발전이 되었는지, 문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자세히 관찰하고 싶다. 그리고 피라미드 건설 현장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노아의 방주와 홍해가 갈라진 모습, 고조선과 단군의 우리 민족의 고대 모습,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 로마의 카이사르가 개선장군으로 로마에 입성할 때의 장면들, 소크라테스가 광장에서 하는 연설들, 예수의 삶, 한반도의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모습들, 한글이 창제되는 과정들, 활자 인쇄술이 발명되는 과정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싸우는 모습들, 19세기의 말의 한반도 정세들 등 가볼 곳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것들을 직접 듣고, 본다는 생각만 해도 황홀하다.
미래로 간다면, 30년 후의 미래로 가서 나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관찰하고 싶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은 30년 후에 어떻게 변했는지, 지금과 30년 후의 세계의 모습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고 싶다. 그리고 100년 후로 가서 내가 없어졌을 때의 세상의 모습은 어떤지 궁금하다. 그 이후의 미래는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없는 미래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SF 영화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이켜 봤을 때, 기뻤던 장면들보다 슬프고, 후회되는 장면들이 더욱 많이 떠오른다. 아마 다시 돌아가서 후회된 일들을 바로 잡는다면 현재의 내 삶이 더욱 행복해 지지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과거로 가기로 선택했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과거를 단순한 기억의 대상이 아닌 구원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는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인 거대한 담론에 대해서 말을 했지만, 나는 나의 개인적 상황에 적용해 본다. 그것은 우리가 시간의 일직선상에 살도록 규정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과 선택이 현재의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트라우마처럼 새로운 음식에 도전했는데 그 음식을 먹고 나서 알러지가 생겨나는 바람에 새로운 음식을 보면 시도조차 하기 싫어서 맛있는 음식이 펼쳐져 있는데 그것을 맛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음식 뿐만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과거에 붙잡혀 버려 더 이상의 내가 성장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 현재가 괴로울 때, 나는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최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차선을 선택하는 경우 등 그것을 일으켰던 과거가 구원되지 않는다면,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이 불행한 경우가 있다.
따라서 나는 한 방향으로 돌아가는 필름처럼 쭉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를 돌려본 결과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 기억이 났고, 타임머신이 주어진다면 그 시간 그 장소로 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하고 싶었던 말을 편지로 써 보았다.
부산 시골의 한 초등학교. 3학년 1반. (전교생이 100명도 되지 않아 각 학년이 1반 밖에 없다.)
2층 건물의 계단으로 올라가자 마자 첫 교실이다.
담임 선생님은 정년을 앞둔 여 선생님이다.
그 선생님이 한 아이를 야단치고 있다. 그 아이가 A라는 친구의 학습지를 가져 갔다는 이유였다. 매서운 손바닥으로 그 아이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다. 그 아이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제가 안했어요! 이건 제꺼에요!!"
선생님은 아이의 말을 믿지 않고, 거짓말 한다며 더욱 세게 때리고 있었다.
"빨리 말해. 네가 가져갔지? 어디서 거짓말이야! 응!"
한참 때려도 그 아이가 가져갔다고 말하지 않자 더욱 화가 난 선생님은 있는 힘껏 더욱 때렸다. 그러자 옆의 옆 친구가 자신의 짝지(짝꿍)을 가르키며 말했다.
"선생님, A의 학습지 여기 있어요."
그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때리는 것을 멈추고, 진짜 그 학습지 가져간 친구 B에게 다가가 물었다.
"정말 네가 가져갔어? 왜 말안했어! 왜 말안했냐고!”
그 아이는 대답을 잘 못하며, 울기만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 B라는 아이에게 매질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실수한 것이 부끄러웠던 나머지 더 크게 야단치며 때렸다. 쉬는 시간 종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선생님의 살풀이는 끝났다. 선생님이 처음에 오해했던 아이를 불렀다.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내가 미안하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오해는 풀렸을지 몰라도, 친구들이 그 당시의 일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그 사건은 큰 충격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어떻게 보면 이 사건은 별일 아닐 수도 있다. 오해도 다 풀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히 이 사건이 내 삶속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고민해 봤을 때,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세상이 위험한 곳이라는 것과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른들이 한번 판단을 내리면 전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절망감을 느꼈다. 이로 인해 내 마음 속에 거대한 장벽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그 사건이후로 나의 관계와 선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는 다 극복했지만,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되었던 이 사건을 다시 직면해서 보는 것은 나에게는 과거를 구원하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그 선생님에게 그때 못했던 말들을 편지를 쓰고 싶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은 이미 저 하늘나라에 계시겠지요. 제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글을 적어봅니다. 선생님은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겪었던 그 사건을 말이지요. 선생님에게는 어쩌면 한 순간의 실수였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가슴 깊이 묻어두고 있었네요.
선생님, 저도 어른이 되고 나니, 어릴 때는 어른이란 모든 것이 올바른 사람이라는 생각에 늘 어른 들의 말을 잘 들어야 착한 어린이라는 말을 듣고, 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니 어른이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실수와 연약함도 받아들이며 다른 사람의 연약함도 이해 할 수 있는 이해의 폭이 넓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타임머신이 주어진다면 어디로 갈것인가?라는 질문에 딱 한번 밖에 쓸 수 없는 귀한 타임머신을 타고 선생님에게로 왔네요. 쉬는 시간에 선생님이 저에게 사과를 하셨지만, 저는 선생님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저를 믿어주지 못했고, 나를 모든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소리치며 매질을 했기 때문이에요.
선생님, 저는 여리고, 부드럽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제대로 알아보시지 않고, 짝지라서 그것을 가져갔다고 생각하는 선생님의 섣부른 판단에 저는 무너져 버렸네요. 제가 아니라고 수없이 말했지만 선생님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제가 거짓말 한다면 더욱 심하게 매질을 했지요. 제가 왜 맞아야 하나요. 오히려 잘못된 것은 선생님의 미숙함과 폭력성이 아닌가요? 왜 저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셨나요? 단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선생님의 폭력은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선생님, 저는 10살 밖에 안되는 어린아이지만, 사람들에게 존중받으며 살아갈 권리가 있는 사랑스런 아이입니다. 언젠가 저 하늘에서 다시 만난다면 선생님이 진심으로 저에게 사과했으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어른이 되었으니 이제 선생님의 미숙함을 용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사람의 미숙함 때문에 저를 상처입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로 왔다. 아내가 물었다.
"과거로 잘 갔다왔어?"
"응"
"증거는?"
그 물음에 나는 잔잔한 미소로 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