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일 좀 하게 해 주라.
정말 생고생을 했다. 홍보부스를 운영한다는 나라는 우리나라에 비해 경제가 그리 발달하지 못했고, 그래서 무슨 국제 배송 하나 보내는데도 신경 써야 하는 게 많았다. 다행히 개인적으로 연이 닿는 사람이 있어 여러 가지를 문의할 수 있었는데, 인쇄 퀄리티를 보장 못하는 건 덤이고 구글맵 상으로 봤을 때는 1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인데 도로의 신호 체계 자체가 엉망이어서 배송 시간도 장담 못한다고 했다.
게다가 현지로 가는 회사 인력의 숙소, 항공편, 교통편 등도 내가 다 컨트롤해야 했고 필요한 것 하나하나 내가 다 정리해줘야 했다.
- 그러니까 필요한 걸 싹 다 정리해오란 말이야.
이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는, 그 나라 통이라는 계열사 대표는 항상 회의 때마다 나를 혼내며 저 말을 했다. 와 아주 죽을 맛이었다. 뭐가 필요하다. 뭐 좀 확인해줄 수 있냐. 이렇게 말하면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다음 회의 때 전부 정리해서 요청하세요. 하고는 뭔가 '에잇 요즘 젊은 놈들이란 쯧쯧' 하는 표정으로 혀를 차며 회의실을 나가곤 했다.
이런 무의미한 회의가 두 번 정도 반복될 무렵, 나는 악이 오를 대로 올라서 엑셀 창 하나 켜놓고 궁금한 거 아주 작은 하나마저 다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리 회사 대표가 불러서 상황을 정리해주기 시작했다.
- 눈을 감고 네가 직접 가는 모습을 상상해봐. 뭐가 필요하지? 하는 물음이 생기면 아 확인해봐야겠구나. 확인했을 때 예상되는 결과가 있지? 그걸 하나하나 정리해봐. 양식을 그려줄게.
대표는 저렇게 가르침을 주면서 자기가 행사를 수 백번은 해봤다면서 양식 하나를 내려주었다. 와. 입사 2개월 만에 양식다운 양식을 드디어 처음 받아보았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불을 켜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각 항목의 예상되는 견적을 알아봐야 했는데 여기서 여우원숭이와의 사건이 터지게 된다.
먼저 나와 여우원숭이는 지난 행사 때 썼던 물품 4종 정도와 새로 제작하면 좋을 것 같은 물품 1종 그리고 개인적으로 건의하고 싶었던 물품 2종을 준비했다. 총 7종의 리스트를 가지고 각각의 이유와 예상 효과를 정리해서 이사에게 보고를 올렸다. 이사는 쭉 훑어보고 세 가지 안을 주었다.
- 일단 추가되는 2종 빼고 5종짜리로 1안 견적 만들어봐. 아 혹시 모르니까 7종짜리도 2안으로 하나 만들고, 정 안 되면 4종으로 3안 가자.
나는 아직 정리해야 하는 항목이 많았으므로 견적은 여우원숭이가 짜주기로 했다. 아니 사실 내가 자면 어차피 여우원숭이가 또 노발대발하면서 바꿀 게 뻔했으므로 맡기기로 했다. 일을 나누고 자리로 돌아와 앉았는데 여우원숭이가 일어나더니 대뜸 물어본다.
- 뭐부터 하면 되죠?
- 다 하긴 해야 할 텐데, 일단 1 안부터 하시죠. 정 시간 없으면 그거 먼저 컨펌받아야 하니까.
- 그 종류 몇 개 빠진 안 말씀하시는 거죠?
나는 잠깐 생각했다. 종류가 빠진다면 1안이랑 3안 두 개니까. 내가 1안부터라고 말했으니까 상식적으로 그렇다 하는 게 맞겠지? 하는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이내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일하려는데 여우원숭이가 말꼬리를 잡기 시작한다.
- 잠깐만요, 1안이라면서요.
- 네 맞아요 1안.
- 그런데 왜 종류 빠진 거냐고 물었을 때 네라고 하셨어요?
뭐지? 분명 한글인데 왜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는 거지?
- 네, 몇 개 빠진 거, 1안 맞잖아요?
- 3안도 몇 개 빠진 거잖아요.
- 1안도 몇 종 빠진 건 맞잖아요. 1안이라고 처음에 말씀드렸고.
- 근데 왜 몇 종 빠진 거라고 물었을 때 왜 그렇다고 대답하셨냐고요.
이야 기가 막힐 노릇이다.
- 알았어요 미안해요. 그럼 1안으로 먼저 작업해주세요.
- 1안 맞는 거죠?
- 네 맞아요.
- 그런데 왜 아까는 그렇다고 하신 거예요? 제가 진짜 몰라서 묻는 거예요.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라고 하냐 진짜. 그렇게 30분인가를 옥신각신 하다가, 아니 여우원숭이의 일방적으로 향하는 화풀이를 받아주다가 이대로라면 오늘 퇴근 전까지 일은 글러먹겠구나 싶어서 사과했다.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잘못된 것 같다고. 우리 서로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를 잘못 받아들여서 이렇게 된 것 같다고. 앞으로는 명확하게 전달해드리겠다고.
차분히 말하고 싶었는데 화가 조금 섞였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일하려는데 여우원숭이가 발을 쿵쿵 구르며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맞은편에서 들어오던 직원 한 명이 왜 울면서 나가지? 하며 이야기하는 걸 들었고, 그걸 얼핏 들은 팀장 빌런 중 한 명이 '누가 우리 여우원숭이 울렸어!' 하며 고함을 질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아무튼 정신줄 간신히 붙잡고 어떻게든 겨우겨우 퇴근시간에 맞춰서 일을 끝냈다. 울다 온 여우원숭이는 그래도 자기 할 일은 해주더라. 생색은 덤이었지만. 완성된 엑셀은 뭔가 그럴듯해 보였고 혹시 몰라서 필요할 것 같은 건전지 하나까지 다 넣었으니 이제 별 말 없겠지, 하고 생각했었다.
큰 오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