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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준 Apr 03. 2019

병신은 뒤통수도 맞지 않는다

아니 맞지 못하는 건가?

우리 회사에서는 총 4명의 직원이 현지 홍보부스 운영으로 나가기로 하였다. 기념품 제작도, 홍보부스 제작도, 배송에 필요한 것도 모두 대기시켜놓은 상태. 결재만 떨어지면 모두 시작할 수 있는 단계였다. 문제는 필요한 걸 전달해줬더니 이게 또 함흥차사였던 거지. 이놈의 조직은 대체 내 손에서 떠나보내 놓으면 아무도 말이 없어.


- 언제 결정되는 건가요? 저희 예방주사 맞아야 하는데.


파견 결정된 직원이 슬쩍 물어보았다. 위생이라든가 여러모로 우리나라보다 열악한 환경이어서 여러 가지 독한 접종을 맞아야 했는데 이게 맞아야 하는 최소 기간이 있어서 맞으려면 빨리 맞아야 했다. 그런데 속 시원하게 결정해주는 이가 없으니 맞아야 하는지 안 맞아도 되는지 아무도 말을 못 해주는 것이었다. 돈을 줘야 뭘 하든가 말든가 하지.


결재해달라고!!! 결재!!!!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직원들이 사비로 접종을 맞으러 갔다. 정말 웃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슬쩍 관련 직원들을 떠보았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들은 이러하다.


일단 홍보부스에 들어가는 돈이 생각보다 많아서 운영할지 안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야! 이거 너네가 하라고 해서 그 생고생하면서 기획안 짠 거 아니냐! 이 홍보부스가 어떻게 이뤄진 거냐면 해외에 있는 큰 체육대회 행사에 파트너십을 맺게 되었는데, 그 특전으로 홍보부스 자리를 점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는 거였다. 이 파트너십을 맺게 된 것이 현지 협력업체라는 망나니 놈 아버지 회사의 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였고.


그래서 이런 기회를 놓쳐선 안된다는 계열사 대표의 주장이었다. 나는 사실상 다른 회사 사람에게 업무지시를 직접 받은 꼴이었다. 문제는 한 100만 원이면 운영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거지. 배송비만 500인가 나오는 기획안을 보고 아차 싶었을 거다. 아니 일단 접종비만 20만 원쯤 나왔던 것 같은데?


게다가 홍보부스 자리도 무상제공이 아니었다.


이건 나도 좀 이상한 부분이었는데 홍보부스 자리를 무상으로 제공해주는 게 아니었다. 자리값만 최소 100만 원, 효과 좀 누리기 위해서는 자리를 행사장 쪽으로 이동하는 게 좋아 보였는데, 자리마다 가격이 달라서 몇 배 이상 더 지불해야 했다. 게다가 이 돈이 3평방미터의 가격이었고, 제대로 운영하려면 두 자리 정도는 사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릿세만 대충 몇 백 깨지는 거지.


심지어 선착순이어서 빨리 결정해야 좀 더 괜찮은 자리로 갈 수 있었는데 아무도 결정을 못해서 계속 미뤄지니 고를 수 있는 자리는 더더욱 안 좋아지고, 그러니 더더욱 결정을 못 내리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었다. 망나니 아들 새끼는 당장 결정해주지 못하면 사고터 진다고 나한테 노발대발했는데 그 시점의 나는 어느 정도 해탈한 지경이어서 예예, 전달하겠습니다. 저는 의사결정권이 없어요. 더 빠른 답변을 원하시면 윗분들에게 물어보세요. 하고 말았다.


정말 없다!


뭐 놀랍지도 않았다. 결국 물리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모자란 시일까지 왔다. 데드라인 당일, 이사에게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으니 다 취소하라고 했다. 배송은 전부 취소했고 제작이든 뭐든 다 접어야 했다. 예방접종 맞았던 직원들은 비싸게 주고 사온 예방약을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고민했었고, 나는 급하게 견적 요청했던 제작사나 배송업체 등의 담당자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사과 말씀을 드려야 했다. 이 일도 이렇게 흐지부지 되어서 사라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내 상상을 한 번 더 넘어선 곳이었다.


뜬금없이 홍보부스를 운영하겠다고 했다! 1주일도 안 남았는데!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었는데 계열사 대표가 이따위도 결정 못 해줄 거면 그만두겠다고 반협박하는 바람에 그룹 의장이 허락했다고 한다. 와. 1주일도 안 남았는데? 게다가 이렇게 빨리 결정이 날 거면 진작 했어야지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망나니 아들놈에게 전화가 오기 시작한다. 전보다 더 다급하게 소리를 지른다. 자꾸 디자인 시안을 내놓으란다.


- 지금 당장 안 주면 아무것도 못한다고요! 지금! 지금 빨리 내놔요!

- 아니 리플렛 시안을 어떻게 지금 당장 만듭니까. 우리도 디자인팀 따로 있어요.

- 지금 당장 안 내놓으면 사고 터진다고요!


안 줘도 안 터지더라. 가만 생각해보면 저 나라에서는 저렇게 다그쳐서 일을 시켜야 잘 돌아가나 싶기도 했다. 다들 게으르고 그래서 관리자 역할을 하려면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다그쳐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은, 그래서 몸에 저런 태도가 배어버린 건 아닌가 생각했다. 뭐 그래 봐야 일단 나는 한국인이며 한국에서 일하고 있고, 그런 내 눈엔 그저 진상 갑질로밖에 안 보였으니까.


시안 하나 넘기는 것도 저 모양이었는데 홍보부스는 가관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현지 업체에서 현수막을 인쇄해서 급하게 꾸렸다고 했는데 퀄리티가 가관이었다. 홍보부스 모양새가 고향 가는 길가에 참외 파는 트럭 아저씨보다 더 구렸다. 그래도 국제 행사인데 이게 말이 되나 생각하고 있는데 심지어 우리 회사에 파견 인력까지 요청했다. 애초에 기획했던 4명이 다 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았고 일단 2명만 부랴부랴 짐을 싸서 출발했다.


이 느낌은 이미 한참 전부터 있었지.


다녀온 후에 어땠냐고 물어보니 에스코트하러 나온 사람도 없었고 운전기사도 없어서 숙소까지 알아서 찾아가야 했고 열악한 홍보부스에서 온 몸으로 땡볕을 맞아가며 개고생 했다고 한다. 여러 의견을 듣고 나름 생각을 정리해서 조합해본 결과, 협력사라는 그 현지 회사는 그 행사에 생각보다 엄청 큰 영향력을 발휘할 생각이 없는 회사였고 우리에게 특별히 거대한 혜택을 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우리를 활용해서 뭔가 하려고 사기... 까지는 아니고 돈이나 좀 받아내고 뒤통수 살짝 때리는 정도로 이용해 먹으려는 모양이었는데. 문제는 우리 회사가 너무 병신이라 제대로 못 때려본 거지.


그렇게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니 이 행사에 관련된 온갖 놈들이 어떻게든 한 숟가락 챙겨보려고 침 흘리면서 달려든 행적들도 보였지만 뒤통수 맞아야 하는 회사가 워낙 병신이라 다들 떠먹어보지도 못하고 다 같이 병신이 되어버렸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게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생각해보다가 이제 수습기간이 1달도 안 남았는데 아무 성과도 없는 나는 어떻게 평가받지? 하는 의문이 더 크게 들기 시작했다.


입사 2달이 지났으나 뭐 한 일이 없다.


그런 생각으로 영혼 없이 출근하던 며칠 후 이사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 야, 너 다른 데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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