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철도 고양이 Apr 15. 2019

난 아직 수습기간이에요

잊으신 거 없나요?

수습이 끝나기도 전에 승진했다고 썼던 적이 있다. 뭐 월급이 오르거나 결재권이 생기거나 하는 아주 조금의 이득도 없는 승진이었지만, 일단 형식상에서는 승진이니까 그렇다 치고, 처음 팀 정체성의 혼란 때문에 조직도상에서는 두 번, 실제로는 한 번의 팀 이동까지 있었으니 참으로 역동적인 수습기간이라 할 수 있겠다. 수습기간이 뭐 그런 건가? 팀 체험 같은 거?


내가 느낀 이 회사의 부서이동


무슨 놀이공원도 아니고. 뭐 무튼 그래도 내 자리 찾았다고 마음 잡고 일해보려는데 사내 팀장 빌런들이 못 하게 괴롭히고 있어서 지쳐가던 차였다. 뜬금없이 이사가 잠깐 보자고 회의실로 불렀다. 나는 수습기간이 끝나가고 있었으므로, 여기에 대한 뭔가 언급할 게 있을까 싶어서 내심 긴장했다. 떨어지는 거 아닐까 하는 건정에서 오는 긴장보다 혹시 탈락하지 않고 이대로 계속 고용이 되면 이 조직에서 어떻게 버티지? 하는 긴장.


- 너 다른 데로 가야겠다.


이때까지만 해도 수습기간 탈락한 줄 알고 쾌지를 불렀다.


- 저 그 말씀은...

- 옆 본부.


이 상황을 설명하려면 조직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이 멍청한 회사는 크게 두 본부로 구성되어있는데 내가 속한 본부는 콘텐츠 제작과 흔히 말하는 바이럴 마케팅 팀이 있는 부서였다. 나는 그중 기획팀이었는데 말이 기획팀이지 별의별 것 다 시켜먹는 기획팀이었다. 광고나 마케팅에 대해 전문성을 가진, 아니 아예 알고 있는 사람 자체가 없었는데 이 본부장인 이사가 기획팀을 만들고 싶다고 우겨서 생긴 팀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그냥 만들고 싶던 팀이어서 만들어진... 


하고 싶은 거 다 해서 벌어진 사단


다른 한 본부는 경영지원팀이 포함된 전략본부였다. 특이하게 경영지원팀과 기획팀이 있었는데 기획팀이 각각 다른 본부에 하나씩 있는 모양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항상 회의도 같이하고 일도 같이 시켜서 뭐가 다른 팀인지도 모르겠고. 일단 이 기획팀도 이 본부의 본부장인 이사도 기획팀을 만들고 싶다고 우겨서 기획팀을 만들어줬다고 한다. 이 전략 본부 기획팀은 뭐가 다른가 보니 일단 업무량이 상당했다. 인원도 가장 적은 팀인데 '일'이라고 부를만한 일은 전부 이 팀으로 몰려있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처음부터 주는 일이 아니라 병신들이 어떻게든 해보려고 붙잡고 있다가 결국 자기들이 처리 못하는 일이라는 판단이 들 때쯤, 그러니까 데드라인 얼마 안 남았을 때쯤 와서 업무를 넘기고 가버리는 그런 팀이었다.


업무만 그러면 상관이 없는데 그 본부 본부장이 참 지랄 맞은 인간이었다. 인성이 아주 뭐랄까. 비유하는 표현이 아니라 정말 쓰레기였다. 다른 본부 사람들이나 심지어 다른 계열사 사람들에게도 유명했는데 그때는 나만 몰랐나 보다. 아무튼 이 팀으로 나보고 가란다. 그 팀에 사람이 세 명 있었는데 한 명이 수습 통과를 못하는 바람에 인원이 극심하게 줄어서 우리 쪽에 인원 충원 요청을 했고 장고 끝에 나를 보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도 없이 고통받느니 일이라도 하면서 고통받자는 생각에 일단 알았다고 했다. 그러고는 우리 팀 사람들을 다 모아서 이사가 뜬금없이 여우원숭이를 보며 너를 보내기로 했다고 장난을 쳤는데, 갑자기 이 여우원숭이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 야 너는 내가 끝까지 지켜줄게! 걱정하지 마 너 안 보내!


야 나는 뭐가 되냐 진짜.


이사는 물론 위로한다고 그렇게 말했겠지. 그런데 너네가 그러면 가는 나는 뭐가 되냐. 이 어이없는 무슨 시트콤 같은 상황을 보면서 자리 정리를 시작했다. 그러고 있는데 내가 이동하기로 한 팀의 매니저가 지나가다가 내 자리로 오더니 갑자기 실성한 듯이 웃었다. 대체 왜 웃냐고 물어보다가 결국 나도 같이 웃었는데 이때는 몰랐다. 이 사람이 이 회사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희망 같은 존재가 될 줄은.


오전에 한바탕 소동이 있었고 오후쯤 되었더니 이사가 갑자기 날 다시 불렀다. 


- 야 너 영상으로 지원했었어?


아, 너 면접에서 나 엄청 좋게 봤다며 여태 지원한 포지션도 모르고 일을 시켰냐.


- 너 영상 얼마나 하는데? 몇 급이야?

- 급수를 어떻게 따지나요?

- 아니 뭐 고급 S급 이런 거 있잖아. 네가 생각하기에 너는 무슨 급이냐고.


이딴 거라도 원했나?


아, 영상 하는데 급이 어디 있냐. 그것보다 이 인간 내 포트폴리오 안 봤구나. 지원할 때 줬던 포트폴리오에서 몇 개 영상 뽑아서 보여주었다.


- 급수는 잘 모르겠고 영상디자인이 부전공이라서요. 이 정도는 혼자 제작 가능한데 몇 급이라고 하면 되나요?

- 너 디자인도 전공했어?


진짜 아무것도 안 봤구나. 후에 알게 된 건데 영상을 맡은 직원들도 일손이 많이 부족한 상황에서 내가 디자인과 영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고, 그때마다 남는 시간에 할 게 없을 때 조금씩 도와주고는 했는데 내가 팀을 이동시킨다는 말을 듣고 이사를 붙잡고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독단적으로 결정해서 정해져 버린 상황이었고 내가 영상 기획, 촬영, 편집, CG까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버린 것이었다.


이후에는 다시 날 데려오겠다고 난리를 쳤는데 나중에 전략 본부의 이사가 이런 말을 했다.


- 아니 오전에 보내놓고 오후에 다시 달라는 거야. 쓸모 있는 놈이구나 싶어서 안 줬지.


빨리 돌아가


뭐 아무튼 그렇게 나는 본부를 옮기게 되었고 그건 대환멸파티의 시작이었다.

이전 10화 병신은 뒤통수도 맞지 않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