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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준 May 05. 2019

촬영 지원 사태

배트 시그널을 사람에게 쏘면 어떻게 될까.

본부 이동이 있고 나서도 A형님은 나에게 일을 부탁하고는 했다. 본인도 뭔가 찔리는 게 있는지 회사 메신저에 자기 자리로 오라며 굉장히 사무적인 말로 오라 하고 막상 자리로 가면 죽는소리를 하면서 일을 부탁했다. 나는 그때마다 업무 부탁할 거면 정식으로 업무 요청서 보내라며 농담 삼아 말했다. A형님은 그럴 때마다 배신감 느낀다며 화를 냈고 나는 그렇게 농담 섞어가며 적당히 일을 끊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보낼 줄은 몰랐다.


촬영 지원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는데 안 그래도 없는 영상 인력 중 한 명은 출장을 간 상태였고, 카메라든 조명이든 잡을 수 있는 인력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때 남은 영상팀 인력은 두 명이었고, 어떻게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인력이긴 하지. 그런데 그게 나 하나 낀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잖아?


직원을! 이렇게! 갈아 넣는다!


살짝 당황해하고 있는데 일단 A형님은 업무 요청서를 보낸 상태고 여기저기 내 직속 팀장, 얌체공 이사새끼 허락도 받아왔고, 일찍 끝날 거라는 말에 오랜만에 저녁 약속 잡아도 될 것 같아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뭐 별 일 있겠어하면서 사전에 만들었다는 스토리 보드를 쭉 훑었다. 금방 끝나겠는데... 라고 생각했으나 몇몇 지점에서 연출이나 촬영이 마음에 걸렸다. A형님을 찾아가 촬영 계획을 슬쩍 물어보았다.


- 그런 거 없어, 에이 그냥 찍으면 돼. 형이 다 편집할 게.


자막 하나 못 만드는 인간이 할 말인가?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정말 믿음직스럽지 않군. 매우 불안했으나 나는 고작 지원 나가는 입장이고 여기 팀도 아니고 내가 가타부타할 부분은 아닌 것 같아서 일단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그리고 촬영이 있던 당일, 이른 아침부터 A형님이 날 데리고 간 곳은 장비 렌탈샵이었다. 우리 회사는 영상 인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장비도 아주 빈약했다.


- 뭘 빌릴 건데?


사실 이전에 A형님은 나에게 장비에 대해 뭘 빌려야 할지 모른다며 자꾸 찾아와서 무슨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제품 이름을 말하고 괜찮을지 아닐지 물어보고는 했다. 처음에는 대충 대꾸해주다가 나도 인간인지라 너무 귀찮아서 진지하게 한 마디 해주었었다.


- 형님, 형님도 분야가 다르지 영상하던 사람이잖아. 형님 눈에 익은 장비들 대충 골라도 아마 다 괜찮을 거야.


아, 이 형님 방송국 다니던 사람이었지.


그리고 이때의 귀찮음은 업보가 되어 고스란히 돌아왔다. 일단 카메라. 대체 광고 영상 찍는데 방송용 카메라가 왜 필요한 건데. 그냥 가볍게 쓸 DSLR 빌리라고 한 다섯 번은 말해준 것 같은데 EFP 카메라를 주섬 주섬 꺼내는 걸 보며 한숨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셋이서 촬영하는데 저걸.... 게다가 본인도 잘 모르는지 거기 서서 샵 직원에게 모든 기능을 하나하나 설명해 달라며 메뉴 하나하나 들어가서 물어보고 있었다는 거였다. 다른 팀원이 배우 기다린다고 가야 한다고 했다가 제대로 해야 된다며 불호령을 들었다. 방망이 깎는 노인도 아니고.


아니 1분짜리 광고 영상 찍는데 이게 왜 필요한데!


조명은 더 가관이었다. 어디서 배트 시그널로 써도 괜찮을 것 같은 조명을 두 개 빌렸는데 족히 50kg은 되어 보이는 박스를 까보고 와 이거 잘하면 썬텐도 가능하겠는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쩌면 족구장 하나 정도는 야간에 경기가 가능하도록 비추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뭔가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으나 2미터는 될 것 같은 철제 지지대를 두 세트 빌리는 걸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소프트 박스 같은 건 당연하게도 없었고.


사진을 찾다 보니 가능하고도 남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대충 300kg은 가뿐히 넘길 것 같은 장비들을 렌탈 샵 앞에 쌓아놓고 막연히 앉아있었다. 당연하게도, 아주 당연하게도 이걸 어떻게 옮길지 생각을 안 해 두었었기 때문이었다. 지나가는 택시 아저씨들은 우리 앞에 오기 전에 불을 끄고 도망가기 바빴고 승차거부라고 화내는 형님에게 누가 이런 철골 구조물을 자기차에 들이겠냐며 진정하라고 했다.


결국 택시 한 대에 옮길 수 있는 짐은 다 싣고 그 문제의 철골 구조물과 배트 시그널은 다른 택시 기사님께 사정사정해서 어떻게든 싣고 움직였다.


- 그래도 어떻게든 다 옮겼네.


차마 이 형님에게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배우 면전에 소프트 박스도 없는 배트 시그널 두 대를 쏴야 하고, 방송용 카메라를 들고 스튜디오 영상을 찍어야 한다는 사실을.


과제가 끝나면 과제가 시작된다.

그리고 다시 반납해야 한다는 사실을.


스튜디오는 대여시간 이전에 장비 설치할 시간을 준다더니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일을 어떻게 해놓은 건지 참 궁금했다. 입구에 짐을 쌓아놓고 대충 여기저기 주저앉아서 햄버거로 점심을 때웠다. 적어도 촬영 한 시간 전에는 설치해놔야 일정 맞출 텐데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느긋할까.


뭐 내가 알아야 할 바가 아니니 일단 햄버거를 먹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촬영 시간이 다 되어서야 스튜디오 관계자가 자다 일어난 상태인 것 같은 몰골로 슬렁슬렁 걸어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자마자 확인한 것은 전기 배선이었다. 조명 장비들만 200kg쯤 빌렸으면 전기는 당연히 확인했겠지,라고 생각했으나 이 정도로 준비성이 부족했다면 이것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네놈이 한 고생의 반을 삭제해주마!


역시, 콘센트가 없었다.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콘센트가 없다니. 정확하게는 한쪽에만 콘센트가 있었고 다른 한쪽은 전선 연결이 안 되는 곳에 있었다. 당연하게도 빌린 지지대가 2m를 넘는 데다가 이 사람들도 설마 여길 빌리는 사람이 배트 라이트를 가져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 들인 수고의 절반이 타노스 손가락 튕기듯 사라졌다. A형님은 그 와중에


- 뭐 조명은 하나만 쓰자.

- 형님, 그림자는 어떻게 하시게요?

- 조명을 쓰는데 그림자가 생기나?


배트 라이트 하나를 사선으로 사람에게 쏘면 그림자가 문제가 아닐 텐데. 빛의 힘으로 사람을 날려버리려는 게 아니면.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조명을 한 개 켜 보니 예전에 일하던 타이어 공장에서 실수로 용광로 문을 열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배우를 암살하려는 시도다. 부모님의 원수라도 섭외한 걸 거야. 하고 생각하며 대체품을 찾았다. A형님은 분위기가 살 것 같다며 좋아한다. 저 사람 눈에 배트 라이트를 쏴줘야 분위기를 파악할 것 같았다.


배우를 이렇게! 날려버린다!


다행히 스튜디오에는 커다란 장막 같은 게 있었고 그걸로 조명 앞을 막으니 그럭저럭 빛이 퍼져서 쓸만해졌다. 문제는 그 정도로 빛을 막을 거였다면 그냥 카메라 보정으로도 해결할 수 있었겠다 싶을 정도로 빛이 약해졌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팀장은 팔짱 끼고 분위기 괜찮네, 하고 한 마디 했다. 이 빌어먹을 한 마디는 촬영이 끝날 때까지 그가 했던 유일한 말이었다.


정말 진땀을 흘리며 촬영장 세팅이 끝나고 이제 촬영을 해야 하는데 이게 또 가관이다. 모든 걸 원테이크로 끝내고 있었다. 오히려 배우가 정말 다시 안 찍고 이대로 가도 되냐고 재차 물을 정도였으니까. 나는 이 인간이 정말 촬영의 신이어서 그런가 생각하면서 카메라를 들고 배우에게 갔고 근접해서 영상 몇 개를 요구해서 더 찍었다.


- 야 스토리보드에도 없는 걸 왜 찍고 있어.

- 형님 가만있어봐. 형님은 이제 편집할 때 나한테 감사하다고 할 거야.


두고봐 한 번


스토리보드에 기획해 두었던 컷들은 내가 보기엔 정말 기획한 놈이 자기가 촬영 편집 다 하려고 대충 끄적인 큰 그림 같아 보였고, 그 구도만 맞춰서 원테이크로 끝내면 될 줄 알았던 A형님의 카메라는 '저걸 대체 어떻게 편집하려고 저렇게 찍고 넘어가는 거지?'라는 의문만 끊임없이 들게 했다.


빌린 시간도 문제였는데, 촬영 시간을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두 시간 정도 촬영이 오버되었다. 힘들게 들고 간 모니터는 연결하는 방법을 몰라서 결국 무용지물이 되었고, 덕분에 촬영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어서 불안과 걱정은 망할 거라는 확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혼돈의 촬영이 끝나고, 기진맥진해진 나는 60% 정도는 상자에서 꺼내지도 않은 그 촬영 짐들을 다 스튜디오 밖으로 끌고 나왔다. 강남대로가 보이는 이 골목의 스튜디오에서 보인 풍경은 퇴근시간의 지옥 같은 풍경뿐이었다. 여길 우리는 택시를 잡아서 반납하러 가야 한다.


나는 침착하게 저녁 약속을 취소했다.


택시를 각자 한 50번 정도 불렀던 것 같다.

지하철로 10분 걸리는 거리였는데 정확히 4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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