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병기 우리 팀
이제 드디어 우리 팀을 소개할 때가 온 것 같다. 내가 몸담은 이 팀은 수차례 있었던 사내 자리이동의 마지막이었으며 유일하게 말이 통해서 뭔가 발전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아주아주 좋은 팀이었다. 그 얌체공 본부장 시
만 아니었어도 아주 좋은 팀이고 성과도 좋았을 텐데. 아무튼 우리 팀 구성원을 잠시 소개하는 게 앞으로 나올 대부분의 이야기에 등장할 테니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늘다람쥐 팀장은 검색광고 매니저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실무에 뛰어들어 온갖 풍파를 몸으로 겪은 인물이었다. 언젠가 한 번 엄청나 보이는 엑셀 작업을 미친 듯이 하고 있길래 이 방대한 수치들은 어디서 레퍼런스를 찾은 건가요?라고 물었는데,
- 제가 옛날에 해보니까 이렇게 나오더라고요.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세상에 그 많은 매체 구좌와 분야별 ROAS를 (Return On Advertising Spend: 광고 투자 대비 회수율) 거의 정확히 외우고 있다니. 다만 나와는 끝까지 입장이 정 반대였는데, 하늘다람쥐 팀장은 정량적인 사람이었고 나는 정성적인 사람이어서 숫자 vs 크리에이티브의 입장으로 자주 부딪히고는 했다.
브랜드에 대한 의견도 달랐는데 나는 전통적인 브랜드 마케터의 입장으로 브랜드가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에서 세일즈 포인트를 만들어 타깃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하늘다람쥐 팀장의 입장은 이미 타깃이 원하는 바는 검색 결과 값으로 충분한 데이터가 있으니 브랜드는 여기에 맞추어 세일즈 포인트를 개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이미지의 방향성을 두고 무엇이 먼저냐에 대한 견해가 완전히 달랐다.
처음에는 크게 반발했고 내가 옳다는 걸 어떻게든 증명해보려고 했는데 이게 일하면 일 할수록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는 기분이었다. 물론 100% 동의를 하진 못했지만 시장을 만드는 일이 왜 어려운지 보다 구체적으로 알게 된 계기였고, 이미 만들어진 시장을 분석하는, 기존에 전혀 가질 수 없었을 터인 몇 가지 시선을 얻을 수 있었다.
아! 하늘다람쥐 팀장인 이유는 유독 체구가 작은 분이었는데 가끔 가오리 티셔츠 같은 걸 입고 오셔서 꼭 날다람쥐 같은 포즈로 돌아다니시고는 했기 때문이다.
하나 슬펐던 부분은 얌체공 본부장이 쥐 잡듯이 괴롭히고 볶아대서 어떤 일에 확신이나 자신이 많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었는데, 이건 정말 마지막까지 발목을 잡고 괴롭히게 된 큰 원인이었고 갈등이었다. 이번 기획서는 망한 것 같다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왜 그런 말을 하지? 하고 이해를 못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들기도 했다.
빛 매니저는 나와 같은 직급의 매니저였는데 내가 발령을 통보받던 날 내 자리에 와서 계속 배를 붙잡고 있던 그 매니저이다. 3명이 팀인 이 팀에서 유일한 내 동료였고, 이 빌어 처먹을 회사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든든한 최종병기 같은 인물이었다.
일단 일을 엄청나게 잘했다. 사람이 지치지도 않고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내고 정리하고 공유하는데 뭔가 맡기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내부 커뮤니테이션도 무엇하나 놓치는 것 없이 철저하게 관리했고, 내외부 미팅이라도 하면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도 잘 캐치해서 관계자들과 공유하고.
디자인도 말할 것 없이 훌륭했다. 본인은 뭔가 배운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이미 사고방식 자체가 몇 년 전공한 사람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있었고 거기 더해 감각이나 센스가 정말 창의력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일도 잘하는 데다가 성격도 밝고 쾌활하고, 겸손하기까지 했다. 이런 사람이 동료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 팀 안에서 하늘다람쥐 팀장이나 내가 일을 하다가 도저히 해결 못할 일이 있으면 빛 그 자체를 소환했고 엎드려 절을 하며 구원의 손길을 내려주시길 바랐다. 한 마디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존재. 빛 그 자체는 부끄러워하면서 하지 말라고는 하는데 역시 엄청난 역량으로 일을 해결해주고 유유히 자리로 돌아갈 때의 간지 폭풍은 정말 본받을만한 자태였다.
빛 그 자체는 삼국지로 따지면 마치 적토마를 탄 여포처럼 업무에 무쌍을 찍을 정도였는데, 문제는 그 능력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이 별 시답잖은 업무까지 압박을 주고 정작 실행도 안 할 기획서를 산처럼 찍어내게 만들었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진작에 포기하고 던질 때도 많았는데 그걸 혼자서 끝까지 완성도를 챙겨 찍어내는 걸 보면서 환생 두어 번 해봐야 저렇게는 못 따라 하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나까지 포함해서 우리 셋은 항상 뭉쳐 다녔고 이 조합은 사내에서도 유명해져서 완전한 팀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 얌체공 개
만 아니었어도 정말 즐거운 회사생활이었을 텐데.
아무튼 우리 팀만 놓고 보면 정말 일 잘하고 즐거운 회사생활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아니 실제로 재밌고 즐거웠다. 같이 게임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빛 그 자체는 담배도 안 피우면서 나랑 하늘다람쥐 팀장이 담배라도 피우러 가면 꼭 따라오면서 수다도 떨고 그랬었으니까.
그런데 얼마 후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