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회사냐 아니면 이벤트 기획사냐
일단 대규모 구조조정 이야기에 앞서, 이 무간지옥에서의 업무행태를 조금 써보자. 주 업무는 광고 기획이었는데 사실상 일은 하늘다람쥐 팀장이 거의 다 했다. 그도 그럴게 이 대행사는 종합 광고 대행사는 아니고 검색광고나 바이럴 마케팅이 주 업무였는데, 그동안 브랜드 기획과 콘텐츠 제작 경험이 주였던 나나 오프라인 행사 업무가 주였던 빛 그 자체는 이런 경험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교육 좀 해달라고 그렇게 졸랐는데 결국 혼자 알아서 배워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아무튼 이 업무 불균형은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쳤다. 얌체공 이사 새끼는 계속 하늘다람쥐 팀장을 쪼아대며 일을 주고, 그럼 가르쳐가면서 일을 줘야 하는데 급한 업무라 하니 혼자 처리하려 하고, 일은 우리에게 내려오지 않고, 자잘한 일이었어도 쌓이다 보니 처리속도는 느려지고, 우린 놀고, 얌체공 이사는 리소스 분배가 안된다고 지랄하고, 뭐 그런 악순환의 반복.
간혹 기획서 작업이나 아이데이션이 필요한 마케팅 기획 일이 생긴다면 모두 참여해서 업무라고 할만한 게 있었지만 그것도 나름 큰 문제가 있었다. 모든 계열사가 우리를 다른 회사가 아닌 마케팅 팀 정도로 밖에 생각을 안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얌체공 이사가 한결같이 말하기를.
- 우리는 광고 기획사야. 돈 받기 전에 일 해주지 마.
라고 하는데 아니 같은 건물에서 매번 얼굴 보는 사람들이 와서 마케팅 기획해달라는데 그걸 뭐 지가 내치던가 해야지 우리는 일개 팀장 하나와 선임 둘인데 그걸 어떻게 거절을 한다고. 게다가 얌체공 이 새끼는 우리한테는 그렇게 소리 지르고 욕해가면서 있는 폼은 다 잡고 정작 그렇게 일 주러 오는 사람한테는 폴더폰 접히듯이 인사하면서 빌빌거리는데.
또 문제는 그렇게 뼈 빠지게 고생해서 기획해주면 결재 라인에서 다 막히고 결국 집행도 안 되어서 돈도 못 가져오고, 그래서 업무 한 것들이 공중으로 날아가고 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니 진짜 너무 늦어서 오늘 당장 필요하다 했으면 결재라도 제대로 해주든가. 데드라인이 내일 까지였는데 결재는 왜 분기가 지나도 안 내려주는 건지.
이런 대 환멸 일상이 지속되는 와중에 결국 나와 내 동기들의 수습 평가 차례가 돌아왔다. 동기들과 모여서 제발 잘리기를 바라는 마음에 반 농담으로 마지막 인사라며 주고받고는 했는데, 일단 A형님은 탈락.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그럴만했지. B양은 일이 있는 팀으로 이동하는 걸로 협의하고 잔류. 이제 나만 남았는데. 남들은 수습 종료 1주일 전에 다 통보받고 나만 종료일이 다와가도 말을 해주지 않았다.
뭔가 입사할 때의 그 방치가 떠오르기도 하고. 직접 물어봐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나를 보내버린 옆 본부서 이사가 슬쩍 오더니 A형님이 퇴사한다는 소식을 말해주었다. 그래도 친한 사이였던 것 같은데 상심하지 말라며. 그런데 말을 하다말고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 야 넌 동기잖아! 넌 평가가 어떻게 된 거야!
이 아저씨야 나도 그게 궁금한데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하라는 거냐. 하는 표정으로 저도 그게 궁금하다며 옆에서 일하던 하늘다람쥐 팀장에게 슬쩍 물었다. 팀장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아! 하면서 나에게 돌아앉아 수습 평가 결과를 알려주었다.
- 아! 맞다 선임님은 계속 일하시기로 했어요.
- 얘 여기서 일한 지 1달도 안 되었잖아. 뭘 보고 평가한 건데?
- 전에 있던 팀 팀장한테 인계받아서 작성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전 팀장에게 수습 평가서 인계를 요청했으나 이름 석자 쓴 빈 문서가 날아왔고, 하늘다람쥐 팀장은 그걸 보고 일을 제대로 해본 게 없는데 대체 어떻게 평가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그냥 대충 써서 평가서를 마무리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2달 넘게 일했던 내 업무 평가는 백지였던 거다. 놀랍지도 않다.
떨어졌어야 했는데... 왜 나는 붙어서 이 생고생을 계속해야 하나. 하는 와중에 곧 대규모 구조조정을 계획하고 있다며 얌체공 이사가 회의를 열어 말을 꺼냈다. 이 그룹에서 경험자가 지밖에 없다고 지가 그룹 전체 구조조정을 맡았다고 했는데, 당분간 비밀로 하고 있으라 해놓고 지가 하도 떠벌리고 다녀서 결국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일이 퍼져나갔다.
아주 멍청하게도 투명하게 공개를 다 한 것도 아니고 춤을 추면서 자랑질만 늘어놓고 다녀서, 이 한정적인 정보를 얼핏 들은 사람들만 많은 탓에 온 그룹에는 온갖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특히 뇌피셜 좀 쓰는 떠벌리기 좋아하는 이들은 온갖 음모론을 퍼트리고 다녀서 다양한 버전의 음모론들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직이 크면 오묘하게도 어울리는 몇몇의 그룹이 생기기 마련인데, 나는 애매하게 여러 그룹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축이었는데 대체 이게 설립된 지 1년도 안 된 회사에서 돌만한 소문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스케일이 컸다.
누가 뭘 횡령해서 뭘 어떻게 회사를 잡아먹으려고 한다는 둥, 누가 누구를 잘라버리려고 정치질을 하고 있다는 둥, 누구는 누구랑 절친이어서 같이 손잡고 그룹의 돈을 뺏어먹으려 한다는 둥. 심지어는 성추행 등의 좋지 않은 소문도 돌기 시작했고, 임원진들의 술자리 사생활 같은 음모론까지도 번져나갔다. 아 이래서 내부 PR이 중요하구나 싶었다.
나는 한 발 빠진 상태에서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었는데 참 가관이었다. 틈만 나면 누가 누굴 조용히 불러서 이야기하다 오는 게 눈에 보였고 그 와중에 있는 폼 없는 폼 잡고 있는 놈들이나 아무 정보가 없어서 불안에 떠는 사원들이나 뭔가 대단한 정보를 가지고 이 혼세 속에서 선동하려는 사람들이나, 뭔가 세기말이 온 사회상의 축소판 같은 느낌이었다.
뭐 아무튼 이 시기에 전체 그룹사를 통틀어 능력이 있다 하는 사람들은 줄줄이 퇴사하기 바빴다. 그도 그럴게 이렇게 까지 흉흉한데 여길 다닐 마음도 안 들 것 같았고 나도 그게 맞다는 생각이었지만 나는 이 재밌는 회사를 더 다녀보기로 마음먹었다. 무엇보다도 하늘다람쥐 팀장을 보며 이 분야에서 더 배워볼 게 남아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고.
그리고 그 선택을 퇴사하는 날까지 후회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