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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고양이 Jun 12. 2019

피바람

이 회사의 평화를 위해 인원 절반을 날려버리겠습니다.

구조조정이 있을 거란 말만 나왔고, 온갖 소문이 무성했으나 정작 며칠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하긴 하는 거냐며 저마다의 기억에서 조금씩 잊혀가는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는 열심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가며 대상자 명단을 알아보려고 노력도 했지만 헛수고였다. 정말 아무도 몰랐으니까.


뭔 놈의 회사가 이렇게까지 역동적일까. 하루도 마음 편하게 있을 날이 없구먼. 하면서 또 기약 없는 기획서를 올리고 까이고 하는 일을 반복하며 지냈다. 슬쩍 보니 흉흉한 소문과 더불어 옆 본부는 할 일이 없어졌는지 다들 노는 모습이 여럿 보이기 시작했다. 동기 B양이 메신저로 슬쩍 나를 불러내었다.


- 오빠 본부에는 일이 많나 봐? 우린 그냥 놀아.


B양의 말에 의하면 몇 주 전부터 일이 아예 들어오지 않아서 다들 손을 놓고 있다고 했다. 이럴 거면 왜 회사가 있는지, 돈은 대체 어디서 벌려서 월급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수다라도 떨고 있다며.


- 오빠는 살아남겠지? 우리 본부는 다들 불안해서 뭐 이리저리 일자리 알아보고 있나 봐.


회사가 끝에 가까워질수록 화기애애해진 다는 사실은 겪어봐야 알지.


전형적으로 망해가는 회사 풍경인 것 같았는데 나는 잘리면 옥수수 농사나 지어야겠다고 지금부터 주소들을 받아서 옥수수를 보내줄 수 있게 농사를 시작하겠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반은 진심이었다. 차라리 옥수수 농사라도 짓는 게 마음 편하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4차 산업 혁명이고 나발이고 이딴 곳을 들어와서 고통을 받고 있는지.


피바람의 징조가 보였던 건 그 이후로 얼마 안 가서였다. 새로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옆 본부가 통째로 날아갈 거라는 소문. 나는 선임이라는 타이틀은 달고 있었지만 수습기간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말단이었고 그런 주요 정보가 들어올 리 없는 위치였다. 하지만 내 자리는 회의실 근처였고 나는 눈치가 꽤 빠른 편이었기 때문에 주워들은 단어들과 회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슬쩍슬쩍 보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자, 진상은 이러하다. 옆 본부 이사의 인맥으로 꽂아 넣은 팀장 빌런들과 매니저들이 2/3 가까이 구조조정의 대상자가 되었다. 내가 봐도 팀장 빌런들은 다 잘리는 게 맞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그 이사라는 양반의 행태가 가관이다. 이렇게 될 바엔 차라리 자기도 그만두고 본부를 다 날려버리겠다고 했다고 한다. 척 보면 씨알도 안 먹힐 협박인데 뭘 믿고 그렇게 당당했던 건지.


너만 죽으라고 


아랑곳하지 않고 구조조정을 실시한다고 밝혔고 그 본부 이사는 자기가 내세운 자폭 카드를 거두지 않았다. 이 회사에 있는 놈들은 딱 그거 같다. 우리가 뭐가 없지 가오가 없냐. 이거. 자존심만 가득한 허세 덩어리들 같으니라고. 대상자를 선별할 필요가 없어졌다. 뭐 본부 인원을 감축할 거면 다 내보내겠다는데. 문제는 그 인원이 우리 회사의 절반이 넘는 인원이었다는 것 정도?


더 큰 문제는 이사가 해고일이 다 와가는데 사람들에게 통보를 안 하고 있었다는 것. 해당 사실을 얌체공 이사 새끼가 알린 후 한 달이 지나도록 옆 본부 이사는 공지를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본부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기가 이번 구조조정에 대해 '위'와 싸우고 있으니 자기를 믿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걸 또 믿은 본부 사람들은 하나같이 '위'를 욕했다. '위'에서 내려온, '위'가 시킨.


- 대체 위가 어딘데?


네가 말한 위가 이 위는 아니겠지 


B양이 뭔가 격한 목소리로 윗사람들 욕을 하면서 그래도 자기네 이사는 믿을만한 것 같다고 말하는 걸 듣고 있다가 참을 수 없어 말을 꺼냈다.


- 지금 너네 이사가 거짓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믿지 마. 좀 이상하게 흐름 잡는 것 같은데 지금 이 상황에 너네가 말하는 '위'가 대체 누굴 말하는 거야. 숨기고 말 안 해주는 거야 지금. 명단 옛날에 다 나왔어.


분위기는 당연히 개판되었다.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알아챈 팀장 빌런들은 모여서 이사 욕을 하기 시작했고 그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매니저급 직원들은 항의하듯 업무에서 일체 손을 놓았고, 이사는 그중에서 그나마 아직 사태 파악이 잘 안 되거나 마음이 모질지 못한 직원들에게 자기가 차렸던 회사 업무를 대놓고 시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구조조정에 대한 언급은 공지하지 않았고 '위'에서 뭐라 말하든 자기가 막고 있다고만 말했다고 했다.


이사 실드? 


결국 시간은 흘러서 숨길 수 없을 텐데. 나는 이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까 지켜보았다. 다음 주에는 말해줄게, 다음 주에는 말해줄게 하고 결과 공지를 차일피일 미루던 이사는 결국 마지막 날의 1주일 정도를 남기고서야 본부 인원 전부를 회의실로 불렀다. 올게 왔구나 생각했다. 명단을 전달한 지 거의 3달 정도 지난 뒤였다.


후에 듣기로는 그 자리에서 이사가 '위'와 격하게 싸웠고 막아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고 결국 본부 전체를 없애기로 결정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작 조정을 맡은 건 네 옆의 얌체공 새끼인데 대체 누구랑 싸웠고 무슨 커버를 쳤는지 이해도 안 되고, 가뜩이나 안 잘려도 되는 애꿎은 인원은 왜 자르는 건지.


거참 신기한 새끼네, 하면서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애초에 잘리든 말든 관심도 없던 터라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 옆 본부가 날아가는 소식을 들었던 당일 얌체공 이사가 회의실로 불렀다.


- 진지하게 해 볼까요 재밌게 해 볼까요?

- 이사님 편하신 대로 하세요.

- 혹시 대상자일까봐 걱정했어요?

- 아뇨, 저는 뭐 잘리면 옥수수 농사나 지으면 되니까요.


진심입니다. 올해도 옥수수 따러 갈 거예요. 


시답잖은 농담 몇 마디 서로 무표정으로 주고받다가 얌체공 이사가 걱정했냐 묻길래 아뇨하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어깨를 거만하게 펴며 허세 가득한 자세와 표정로 말했다.


- 아아 뭘 그리 걱정해애~ 너희 팀은 걱정 말라했잖아~ 그 정도도 눈치 못 챘어?


멘트를 연습했나 보다. 이렇게까지 자동으로 튀어나올 정도면 집에서 몇 번 연습하고 왔겠어. 그런데... 나는 진짜 하나도 걱정 안 했다니까... 그리고 네놈이 하는 말은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 전혀 모르겠던데.


이후에 알게 된 것은 자기 본부에서 자기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던 경영지원 한 명 자르는 걸로 자기 본부 전체의 출혈을 막고 이 회사의 모든 실권을 장악해버린 이 피바람의 최종 승리자, 얌체공 이사 새끼가 만든 작품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느낌이었겠지.. 


이후 우리 회사는 본격적으로 얌체공 이사의 단독 집권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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