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지옥에 빠지게 되었을까
피바람이 지나간 이후 회사는 표면적으로 급격한 평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광스터는 본부장 자리에 오르더니 자기 직원을 마구 뽑아대기 시작했고, 사무실에서는 사람인 이력서를 보고 면접 제안을 주겠다는 전화 소리만 연일 가득 메웠다. 나 또한 할 일이 없어졌다. 실권을 잡은 얌체공이 그동안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전부 쳐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놀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일이 없는 와중에 하늘다람쥐 팀장만이 별의별 일을 다 맡아서 하느라 혼자 바빴는데 어느 날 나와 빛 그 자체를 불러 조용히 이야기했다.
- 이제 우리도 수익을 내야 해요.
피바람의 가장 큰 명분은 수익이었다. 블록체인 사업이라는 큰 명분으로 시작했던 회사는 초기 투자자들로 인해 넉넉한 자금으로 운영이 가능했지만 그 많은 돈을 가지고 한다는 게 그룹 의장과 친분 있는 대표이사들, 그들과 친한 이사들, 그들과 친한 팀장들이 능력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친분 사슬로 줄줄이 꽂혀있는 구조였기 때문에 근본 없는 조직구조로 돌아가고 있었다.
능력이 좀 있다 싶으면 이러한 조직구조에 회의감을 가지고 퇴사했고, 이 자리를 다시 인맥으로 채우고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쌓아둔 투자금은 축나기만 하고 그룹 전체가 돈을 못 버는 구조가 탄탄하게 완성되어가고 있었지만, 서로 친하다 보니 뭘 어찌할 수 없는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있었다.
그룹 전체에 불어닥친 피바람의 주요 희생자들은 이 인맥으로 성사된 임원진이 대부분이었겠지만 이 사태 이전 일찌감치 능력자들은 발을 뺐고 결국 거의 껍데기만 남아버리게 된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수익을 내야 한다는 거대한 과제를 하늘다람쥐 팀장에게 넘겨줘버렸다.
- 수익모델을 우리가 짜야해요.
과제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수익모델과 회사의 정체성. 나는 이 두 가지를 왜 임원진이 구상하지 않고 여기까지 내려온 건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회사가 힘들면 모두가 이 고민을 해야 하는 게 맞겠지만 사업 기획과 검증, 실무까지 다할 거면 우리가 굳이 한 회사, 한 본부, 한 팀으로 일할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 이 정도로 일을 맡을 거면 그냥 우리가 회사를 차렸겠지. 우리 대표이사와 이사들은 뭐하고.
하늘다람쥐 팀장은 그래도 윗분들이 이해가 된다면서 뭐 여러 가지 방향성을 제시해주었다. 블록체인 마케팅 대행이나 일반적인 광고 대행 같은 다양한 방향을 제시하면서 이쪽으로 한 번 조사해보고 우리 회사의 정체성을 살려보자며. 그런데 정말 큰 문제는 일할 사람이 세 명뿐이라는 거였다.
셋이서 뭘 하냐. 아니 뭔들 할 수야 있겠지. 근데 일 할 사람이 진짜 셋 뿐인데 뭘 할 수 있다고 해야 하고 셋다 블록체인 초보자들인데 무슨 마케팅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고 어필하고 강점을 잡아야 하나. 그날부터 블록체인 시장에 대한 공부와 기획서 작업을 병행해야 했다. 하면 할수록 이건 사람이 할만한 게 못 되는구나, 대다수의 암호화폐는 정말 사기에 가깝고 인맥 장사에 불과하구나. 하는 내용밖에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회사의 일원이었고 시키는 일은 불합리하다 생각 들어도 해야 했다.
얌체공은 기획서가 올라올 때마다 하늘다람쥐 팀장과 우리를 쥐 잡듯이 잡았다.
- 이게 저희가 생각하는 전문성이야? 너네 이거 잘해?
아니 우리 잘하는 거 없는데? 지금 공부하고 있는 거 뻔히 알면서 무슨 우리만의 강점을 자꾸 찾아오라고 그러냐. 가뜩이나 바이럴 마케팅하던 본부는 통째로 날려버리고 콜 영업할 사람들만 주야장천 뽑고 있는 게 현실인데 여기서 내가 무슨 강점을 어떻게 찾아서 어디다 어필하라고 그러냐. 그러지 말고 네가 좀 말해주라. 이걸 강점으로 삼을 거니까 이렇게 공부해라라든가. 하다못해 뼈대라도 좀 잡아주라.
십 수 번을 까이면서 하늘다람쥐 팀장은 제발 도와달라고 얌체공 이사에게 요청했고 그때마다 얌체공은 매우 거만하고 거만하게 그건 우리들의 일이라며 이 정도 일을 자기한테 부탁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을 잘랐다. 더 배우고 치열하게 고민해보라고 무슨 알을 깨는 과정이라고. 언제는 회사가 학원이냐며 지랄하고 혼냈던 건 기억이 안 나나 보다. 내 생각엔 그냥 지 술 먹으러 다니는데 우리가 조르니까 귀찮았던 거 조금과 어떻게든 허세 부리고 싶은 마음 대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무슨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일을 해도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물론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 일을 해도 하는 게 아니었다. 며칠을 고민해서 기획서를 쓰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건 순식간이었고, 나중엔 아예 아이데이션 단계에서 보고를 올렸으나 그냥 먼지가 되어버리는 게 거의 당연하다시피 되어버렸다. 와중에 우리끼리는 이런 이야기도 한 적 있었다.
- 그냥 제 발로 나가라고 말로 하기 싫어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의심이었다. 그냥 마음에서 모두 내려놓고 차라리 이럴 거면 콜 영업이나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며 웅성거리던 어느 날이었다. 얌체공이 드디어 뭔가 물어왔다. PT에서 뺨만 안 치면 따올 수 있는 건이라며 억대 예산의 IMC RFP 하나를 어디선가 받아왔다. 우리는 드디어 일다운 일이 들어왔다며 내심 기뻤다. 드디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구나! 이 새끼가 그냥 술만 처먹고 놀기만 하는 놈은 아니었구나! 하면서.
그 RFP가 파멸로 향하는 결정적인 단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