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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고양이 Jul 05. 2019

떨어진 피티와 강제 연차

신박한 방법으로 생색내기

위풍당당하게 피티를 떠난 얌체공 이사와 동행했던 하늘다람쥐 팀장에게 슬며시 물어보았다.


- 피티는 어땠나요?


하늘다람쥐 팀장은 뭔가 슬픈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 가는 내내 피티 잘하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해주더라고요. 자기가 하는 거 잘 보고 배우라고.


가는 길이 한 시간은 족히 넘었을 텐데 그동안 계속 어떻게 하면 피티를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고 한다. 하늘다람쥐 팀장도 뭔가 대단한 걸 보고 배울 수 있을까 싶은 기대도 조금 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게 얌체공 이 새끼는 누가 어느 자리에서 단상에 오르거나 말을 할 때 병신 같다면서 엄청나게 욕을 하던 인간이었으므로 우리는 모두 그의 피티 능력이 뛰어날 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뭔가 피티를 잘할 것 같은 자세


- 근데 망했어요. 클라이언트 쪽에 분위기 있는 분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이랑 눈 마주치는 순간 말을 버벅거리시더라고요. 해야 하는 말도 까먹고 다 날려먹으시고.


허허허. 이 병신이 그러니까 뺨만 안 치면 따올 수 있는 피티를 망해서 돌아왔다는 이야기인데, 일단 나는 '그래도 뺨을 치진 않았죠?' 하고 되물었고 그렇다는 말을 듣고 나서 '그럼 뭐 되겠죠 뭐. 한 말이 있는데.' 하고 허탈감을 그냥 전가하고 털어냈다. 그때부터 약간 이 얌체공 이사 놈이 우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진 건 아주 쥐뿔도 없는 게 허세만 가득 차서 요란한 빈수레 같은 느낌의 인간이었다. 그러니 자기보다 뭔가 위치가 높은 사람한테 폴더폰처럼 숙여가며 인사하다가 뒤돌아서면 쌍시옷 소리 먼저 내고 깔보고 그러는 거지. 있는 허세 없는 허세 다 부려가면서. 그게 자기 빈 속을 숨길 수 있는 문자 그대로의 허장성세 같은 거니까.


강자 앞에선 그랜절도 시키면 했을 거다.


그때부터 이 인간이 지랄을 해도 화가 나거나 반성해야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병신 또 소리 지르네 풋. 하는 생각. 이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했을, 정확히 말하면 얌체공 새끼의 실수는 숨긴 희망찬 보고만을 들은 대표는 피티 어땠냐며 빛나는 눈으로 물었고, 얌체공 이사는 왜 소식이 없지? 하면서 뻔히 보이는 오버액션을 했다. 네가 망쳤으니까 연락이 없겠지.


최종적으로 피티에 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우리 팀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덤덤한 생각이었고, 얌체공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기획서를 잘못 만든 것도 아니고 마지막에 망친 게 발표자인 자기였는데 무슨 주둥이가 몇 개나 더 있어서 그 상황에서 누구에게 무슨 탓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을 꽂아주려고 했던 대행사 대표는 이번 기획서를 아주 좋게 봤다며 다음에 다른 일을 맡길 테니까 있어보자고 말했다고 한다. 이 대행사 대표라는 인간 역시 분리수거가 애매할 것 같은 타는 쓰레기 양반이었는데 다음에 좀 자세히 다뤄보자. 내가 이 인간 때문에 이 사건 이후 퇴사할 때까지 별 개 같은 일을 다 겪어봤으니까.


진짜로 다시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뭐 이 일은 둘째치고 그룹의 막장 행보가 시작되고 있었다. 연말이라며 홀을 하나 빌려 파티를 크게 열었는데 일단 이건 그렇다 치고, 의장이 크게 쏜다면서 전체 휴무를 주겠다며 큰 선심을 쓰는 거라면서 박수와 호응을 요구했다. 연차에서 소진된다는 공지는 다음날 올라왔다. 심지어 연차가 안 남은 직원은 다음 해 연차에서 자동 소진된다는 -1 연차. 심지어 이 -1 연차 전체 휴무는 2일이나 강제되었다.


파티 자리도 굉장히 짜증 나고 불쾌했다. 계열사 중에 수익모델이 없는 우리 회사를 은연중에 무시하는 분위기였는데 일은 일대로 다 시켜놓고 돈을 안 준 게 어느 놈들인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어떤 프로젝트는 우수한 성과를 거두었다며 인턴까지 불러서 포상을 줬는데 우리 팀이 밤낮 매달려서 참여했다가 결재가 안 떨어져서 돈 한 푼 못 받다가, 외주 업체 관계 다 끊어먹고 자동으로 우리 팀만 엎어진 그 프로젝트였다. 울화가 치밀어서 더는 못 보겠더라.


왜 너희가 포상받는데 왜 우리가 일을 했냔 말이야


그래도 그 자리에서 달아날 수가 없었다. 의장 놈이 나가려는 사람들 보면서 지금 나가면 절대 안 된다고 지랄한 건 덤이고 한 명 한 명 체크해서 팀장들에게 보고하라며, 내일 자리 뺄 거라고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저거 농담으로라도 저딴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했는데 뒤풀이 장소가 더 대박이다. 무슨 7080 라이브 카페 같은 곳이었는데 공간이 협소해서 의자를 자리 사이사이에 끼워서 앉아야 하는 곳이었고 모두가 다닥다닥 붙어 앉아야 하는 정도의 술집이었다.


미친 새끼. 욕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거기서 마이크를 붙잡고 문 근처에 있는 사람들 옷 색깔을 말하면서 빨리 들어오라고 명령했고 똥 씹은 얼굴로 다른 직원들이 나와서 팔을 붙잡아 끌었는데 나는 그걸 가만히 보고 있다가 그냥 뒤돌아서 나와버렸다. 지난 밤에도 업무 때문에 새벽에 퇴근했는데 이딴 곳에 더 이상 머무르고 싶지가 않았다. 뒤에서 누가 부르는 것 같았는데 그냥 무시했다.


심지어 건배사를 더럽게 많이 시켰는데 시킬 때마다 뒤에 자기의 훈화 말씀을 5분 넘게 꼭 붙이더라.


우리 팀도 그냥 다 가면 좋겠는데. 그 와중에 광스터와 얌체공이 멋있는 척하며 우리 팀을 다 빼내 주었다. 큰 선심 쓰며 위해주는 척하면서. 그래도 잘한 일이니까 칭찬은 해줘야지. 잘했다, 덕분에 마음은 다소 편해졌다. 다른 계열사 직원들의 울 것 같은 표정들은 내심 마음 쓰였지만. 


나오면서 입구로 슬쩍 본 술집 안은 아수라장 같았다. 어두운 굴 같은 곳에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굼실대는 꼴이 정말 징그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풍경은 제발 출퇴근 지하철로도 족하니까 좀 환경이라도 제대로 된 곳을 골랐으면 좋았을 걸. 아니 그래도 물론 싫었겠지만.


대충 이런 모습이었다. 끔찍했다.


그게 그 병신 같은 회사에서 보내게 된 2018년의 막바지 모습이었다.

그리고 2019년 1월,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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