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돈 어딨냐.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전부터 조짐은 있었다. 은행 정산이 안 되어서 입금이 조금 늦어진다는 핑계로 며칠 씩 밀렸던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속으로 웃었다. 어디서 돈 빌리려다 뭔가 꼬였나 보다 하고. 물론 나의 좁은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본 거라 확실하지는 않겠지만 변명하는 사람의 허둥거림을 보았을 때는 거의 맞지 않았나 싶었다.
길면 주말 끼고 3일 정도 늦고 그랬었다. 어떤 직원은 넘치는 패기로 사내 커뮤니티에 장문의 글을 써가며 지연되는 입금에 대해 쓴소리를 남긴 적도 있었는데 며칠 지나서 문득 조직도에 이름을 검색해보니 없어져있던 적도 있었다. 이전 회사에서 이미 체불의 늪을 겪어본 나는, 그리고 월급을 주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녀본 경험이 있던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았었다. 설마 이 정도 규모 가지고 몇 푼 떼어먹겠어. 하고.
오산이었다.
이번엔 변명부터 달랐다. 모회사가 뭔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 각 계열사의 돈을 전부 가져갔으나 이 사업이 실패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로 시작했다. 무슨 사업인지 알려주지도 않고 무작정 한 달 만에 사업 하나가 무너질 수 있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더 웃긴 건 모든 계열사의 법인 계좌의 입출금을 모회사가 전부 통제하고 있었고 거기서 돈을 빼간 거라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었다는 것이 대표의 변명이었다. 이럴 거면 뭐하러 법인을 따로따로 만들어서 계열사라고 해놓은 거지? 아무튼 그래서 나는 신년부터 기약이 없는 체불 통지를 받게 되었다.
이게 사실 거대한 문제의 시작이긴 한데 체불 초반에는 대부분 사태의 심각성을 실감하지 못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일단은 그러려니 한다. 그러다 카드값 결제일이나 월세 지불일, 통신비 이체일 등이 다가오면 그제야 하나 둘 돈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실감하고 그제야 반응이 시작된다.
침착하게 진정 제기를 넣거나 아니면 자신의 직속 상사와 면담요청이 잦아지거나, 어느 날 면접복장으로 반차를 내거나 하는.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솔직히 그 전의 경력들이 너무 짧아서 최소한 다닐 수 있을 때 까지만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다녀보자는 게 각오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게 진짜 '다닐 수 있을 때까지'가 되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체불 상황이어도 일은 해야 한다. 그래야 회사가 돈을 벌고 나도 내 월급 가져갈 확률이 조금이라도 생길 테니까. 그런데 이 상황에 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돈도 안 주는 마당에 누가 누구한테 일을 시키고 혼을 낼까? 이게 정말 웃긴 상황인 건 맞는데 이 상황에 병신같이 직원들에게 지랄을 멈추지 않던 이들이 있었으니 광스터와 얌체공 두 놈이었다.
얌체공이 일을 가져왔다며 일을 주었다. 일전에 피티에서 졌던 그 대행사 대표가 무슨 신사업을 한다며 우리에게 마케팅을 맡기고 싶다고 했다. 매출에서 일정 부분을 떼어가고 대행이 아닌 협업의 방식으로 진행하자며. 얌체공은 우리 회사가 매출을 낼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 이것 잘 좀 만들어보자고 가져왔다.
여기서 굉장히 커다란 문제. 그가 전달한 제안 요청은 정확히 이 한 문장이었다.
런칭 첫 분기 10억 매출이 가능한 마케팅 기획안을 가져오라.
이런 방법을 내가 알고 있으면 내가 널 위해 일을 안 하겠지 이 거지 같은 인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