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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고양이 Jul 15. 2019

밀샤사화

사실 이거 쓰려고 이 매거진 시작했다.

10억.


뭐 만들라면 만들 수 있지. 솔직히 불가능한 매출은 아닐 거라고 생각도 했다. 예산으로 잡아둔 마케팅 비용이 없으니 그저 싸게 해 달라는 말을 듣기 전 까지는. 이 도둑놈의 심보를 철저하게 가지고 있는 대행사 대표는 욕심만 머릿속에 가득한지 그냥 이 미션 툭 하나 던져주었다.


- 아니 그러니까 마케팅에 돈 안 쓰고 10억 버는 방법을 우리가 알면 그냥 우리가 벌면 되는 거 아닌가요?


업무지시를 위해 팀을 모은 하늘다람쥐 팀장에게 물어보았다. 역시 같은 마음인지 고개를 저으며 그저 까라면 까야지 어떡하냐는 식의 답변과 한숨만 뱉을 뿐이었다. 이후로 우리 자리에서는 한숨과 탄식이 가득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도 우리가 뭘 팔아서 10억을 만들어야 하는지 몰랐으니까.


후....


몇 번 물어보니 그제야 무슨 수제간식을 팔 거라고 말해주는데 아무리 물어봐도 그저 수제간식을 팔 거고 매출 10억짜리 기획서이면 되니까 간단하게만 만들라고 한다. 아니 그러니까 글쎄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으면 내가 이 회사에서 이런 취급받으면서 안 있는다니까 그러네.


당연히 야근, 그것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헤매는 밤샘의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하루 4시간 정도 자면 많이 잔 날이었던 것 같다. 그냥 일반적인 기획서만이라도 꾸며보자고 해서 꾸며보았다. 그러나 10억의 매출을 3달 안에 만들 수 있는 근거자료와 매출 추이 그래프는 어떤 신빙성도 찾을 수 없었고 타임테이블 역시 어떻게 해도 만들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뭘 어떻게 팔아야 할지 모르니 세일즈 포인트도 타깃도 그 어떤 아무 정보도 없기 때문이었다.


어쩌라는 거야.


이 판국에 얌체공의 지랄이 시작되었다. 그 간단한 걸 왜 못하느냐며. 그러면서 그 대행사 대표와 광스터놈과 술이나 마시러 다니고 형님 동생 하면서 자기가 무슨 회사에 엄청난 공헌을 한 것 마냥 어깨에 힘을 주고 돌아다녔다. 우리는 월급도 안 나오는 마당에 대체 왜 이딴 일을 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으며 얌체공의 지랄을 이겨낼 기운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떻게든 기획서를 만들었고 피티를 하러 갔으나 결과는 두 말할 것 없이 대참사. 이게 잘 통과되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하늘다람쥐 팀장의 멘탈은 나갈 대로 나갔고 얌체공 놈의 체면도 살짝 구겨진 것 같았다. 대행사 대표는 정말 썅놈 오브 썅놈이었는데 광스터는 당연하게 하대했고 자신에게 형님 형님 하는 얌체공도 은근히 뭉개면서 갑질이란 이런 것이다 하는 정석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하긴 그렇게 극진히 모셔가며 귀빈 대접을 해주는데 웬만하면 썅놈이 되지. 하물며 부하직원인 우리는.


왕 대우를 해주니까 진짜 지가 왕인 줄 알잖아.


기획서가 한 번 까일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업무량을 말도 안 되는 시간과 함께 던져주었다. 이게 디테일한 업무지시는 없고 그냥 기획서의 근간이 되는 부분들을 쥐어흔들면서 '이걸로 10억 벌겠어?'라는 말과 함께 모레까지 고쳐와 라든가 주말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업무를 시킨다거나 했다. 단톡 방을 만들어서 실무자들을 초대하고 업무를 따로 내린다거나 파일명이나 파일 내 디테일 따위는 아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지 입맛대로 바꾼 포맷을 시시각각으로 보내서 업무에 대혼돈을 실시간으로 하루 두세 번씩 준다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위대하다. 추가된 정보라고는 브랜드 네임 정도가 정해진 것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기획서라고 볼 수는 있을 정도의 것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얌체공 이사 눈에는 안 찼던 것 같다. 그렇게 까실 거면 제발 뭐라도 직접 보여주기라도 하라고 애원했고 마치 뭔가 커다란 선심 쓰는 것 마냥 얌체공이 기획서 원본 파일을 보내달라며 자기 노트북을 붙잡았다.


그날 새벽까지 얌체공의 한숨과 질타가 섞인 지랄이 계속되었다. 뭔가 허세 잔뜩 부리며 마우스를 잡았다가 본인이 주도하지 않은 양식과 수식 앞에서, 그리고 사양 낮은 본인 노트북과 술을 얼마나 처먹고 다녔는지 가늠이 안 되는 수전증으로 빗나가는 클릭질은 얌체공 보다 내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를 지경이었다. 얌체공도 자기 화를 못 이겨 결국 폭발했고 우리는 돌아가며 그 지랄을 견뎌내야 했다.


무슨 알코올 중독자처럼 손을 떨어대던 그놈 마우스는 3축 손떨림 방지로도 모자랄 것이다.


- 내가 이거 끝나면 양식 통일하는 교육 한 번 시켜줄게.


이로부터 이 새끼가 회사를 도망 나가기 전까지 단 한 번도 그딴 교육은 없었다. 애초에 교육은 할 줄 아나? 아니 애초에 네놈이 손만 안 떨면 아마 두 시간은 일찍 끝났을 리뷰일 텐데. 그리고 양식이 아니라 제발 내용을 봐달라고.


더욱이 가관인 건 폰트의 문제였다. 당연하게도 얌체공이 편집하겠다고 받아간 파일은 PPT 원본이었고 당연하게도 폰트 설치가 필요했다. 폰트를 설치해준다고 해도 끝까지 고집부려가며 원본 수정을 고집하는 걸 보며 기가 찼지만.


- 광고주 컴퓨터에도 폰트 깔아줄 거야?


하는 말에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아니 광고주한테는 PDF로 보내겠지 그걸 PPT 원본 파일로 보내겠냐만은. 점점 지랄의 강도가 높아졌고 분위기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는 험악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랄이 거듭될수록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우스워졌다. 너무 압박이 심해서 내가 미친 걸까? 하고 생각해봤는데 그건 아닌 거 같았다. 그냥 나는 그 상황이 점점 우스워졌다.


그럴 거면 그냥 꺼지라고 쫌.


- 이 폰트 대체 누가 썼어?


나름 브랜드 이미지와 잘 맞는 것 같아서 예전 기획서에 썼던 폰트를 그대로 가져와 썼었다. 물론 그 예전에 썼던 기획서라는 건 내부 컴펌 외부 PT 다 통과했던 기획서였고. 우리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 예전에도 썼던 폰트고 브랜드 이미지에 맞을 것 같아서 썼습니다.

- 야 하늘다람쥐. 다음부터 이 폰트 눈에 보이면 내가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때릴 거야. 진짜로 때릴 거야. 진심이야. 진심으로 때릴 거야.


지랄이 도를 넘은 거 아닌가? 얌체공이 이를 갈며 분노를 가득 담아 말하는 저 '때릴 거'라는 말은 갖은 욕설과 함께 계속되었고 우리는 어안이 벙벙해져 얌체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슬라이드가 넘어갈 때마다 욕설과 함께 폰트를 일일이 수정했고 수전증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와중에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못 참고 고개를 돌려 그냥 웃어버렸다.


그 당시 내 마음속, 소리 내서 못 웃은 게 아쉬웠지만.


그 상황이 정말 우스웠다. 이게 대체 뭐라고 마흔 가까이 처먹은 이사라는 양반이 20대 후반의 여직원을 진지하게 때리겠다고 겁박을 주나. 이게 대체 뭐라고 저 달달 떨리는 손으로 욕지거리와 함께 지 분노 하나 못 다스리면서 지랄을 하며 저러고 있나. 대체 이게 뭐라고. 얌체공도 그러다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는지 나를 보며 말했다.


- 앞으로 이 폰트 한 번만 더 나오면 네 목을 따버릴 거야.


하마터면 대폭소 할뻔했다. 그 달달 거리는 손으로 잘도 내 목을 따시겠다. 월급도 안 주는 마당에 새벽까지 이렇게 욕 처먹고 앉아있는 것도 고역이구만. 저 협박이 서너 번쯤 반복되었을 때쯤, 빛 그 자체나 하늘다람쥐도 우스웠는지 고개를 돌리고 몰래 웃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그때부터 아마도 얌체공은 두려움의 호랑이 새끼가 아니라 그냥 인간적인 병신처럼 보였던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참신한 종류의 미친놈으로.


나도 솔직히 한 병신력 하는데 이 새낀 더하네.


와중에 얌체공 혼자 진지했다. 이 와중에 '이렇게 까지 말했으면 애들이 날 무서워하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이날을, 우리는 폰트의 이름을 따와 밀샤사화라고 부르며 기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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