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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고양이 Jul 20. 2019

광스터 PM의 시대

너는 PM이 뭐라고 생각하냐.

하늘다람쥐 팀장의 부재는 몇 가지 변화를 불러왔다. 우선 왜 그렇게 당당했는지 모르겠으나 광스터가 대신 PM의 자리를 차지했고 자신감을 내 비쳐 보이며 특유의 거드름과 거만함으로 회의를 이끌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는데 내용은 아주 그럴싸하다.


- 내가 아는 MD들에게 부탁하면 게임 끝나니까 기획서만 어떻게 통과되게 써봐. 판매만 들어가면 쉬워져.


택도 없는 소리. 애초에 그 기획이라는 것 자체가 답이 없는데 실행에 옮겨진다고 답이 생기리가 없다. 애당초 그런 자신감이었으면 이 불필요한 과정 때문에 계속 일정 미루지 말고 그냥 바로 실행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 다 모르겠으니까 그 전문가라는 MD 연락처라도 좀 달라고. 같이 미팅해서 기획서 끝내버리게.


언제나 이상과 현실은 다르지.


광스터의 그 '아는 MD'는 하늘다람쥐 팀장이 있을 때부터 나오던 드립이었다. 웃지 못할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이 연일 계속되었는데 하늘다람쥐가 광스터에게 MD 연락처를 달라고 하면 기다리라고 했었다. 그러다가 결국 기획서에 '차후 MD와 상의해서 채워야 할' 구멍들이 생기게 되었고 컨펌하는 얌체공의 입에서는 당연히 좋은 말이 튀어나올 리 없다.


- 왜 안 물어봤어? 모르면 쫌 물어보랬잖아.

- 광스터 본부장에게 물어봤는데 기다리라고만 하라고 하셔서...

- 기다리라고 하면 마냥 기다릴 거야?


그럼 기다리라는데 기다려야지 어떻게 하라고. 물론 마냥 기다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연락처를 달라고 해도 기다리라고만 했고 나중엔 화를 냈다. 그런데 더 이상 뭘 하라고. 외부인도 아니고 내부인이, 그것도 상급자가 저 모양인데. 뭐 나중에야 사실 이 인간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있어도 도움 안 되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안다며! 아는 MD 많다며! 기획만 하면 된다며!!!


어찌어찌 사업은 돌아갔다. 기획서는 별 상관도 없이 사업이 돌아간다. 다만 이 클라이언트의 지랄 맞음은 공장에도, 쇼핑몰 제작 업체도, 제품 사진 찍는 스튜디오에도, 골고루 돌아갔으므로 일정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우습게도 그 모든 외주업체 중에서 우리가 제일 만만했는지 까이고 털린 건 우리밖에 없었다. 다른 업체는 그냥 일 못하겠다고 손 떼버렸다고도 한다.


하늘다람쥐 팀장 이후 내가 잠깐 PT를 맡았으나 시작도 하기 전에 욕먹고 나가떨어졌다. 사유는 '최신 파일의 제품명이 아니며 가격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였다. 일단 전자는 내 실수 인정. 제품 리스트를 20분 간격으로 카톡으로 보내주고 파일명도 제각각이고 최신 파일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 전에 보내준 파일이며 그 와중에 엑셀 탭 별로 상품명이 달랐지만 그래도 클라이언트님의 마음을 못 읽은 내 실수겠지.


차라리 이게 낫지. 클라이언트가 직접 작업을 시작하면 파일 정리에 답이 없어진다.


후자는.... 결국엔 그렇게 가격 매길 거였으면서. 그리고 무슨 적자고 뭐고, 언제는 가격 생각하지 말고 최대한 자유롭게 상품 구성해보라면서. 그리고 그건 진심으로 MD의 영역이었다. 소셜커머스, 오픈마켓에서 진행할 기획전과 특별전들 상품 구성하고 가격을 기획하는 부분이었는데 MD에게 자문을 구할 수 없어서 그냥 타사 레퍼런스와 가격 구성표를 보고 몇 날 며칠을 개고생 해서 만든 구성이었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앉아있어야 하는 물음이 머릿속에 가득했으나 뭐 어쩌겠는가. 하라면 해야지.


이게 광스터가 PM을 맡으면서 실질적으로 PM이 없는 프로젝트로 전락해버린 결과였다. 광스터는 프로젝트에 하등의 지시도, 방향성의 제시도 없었으며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고 계속해서 한 발 빠진 상태로 지랄만 해대는 게 업무의 전부였다. 그러니 클라이언트는 PM이 아닌 그 밑에 나와 빛 그 자체에게 지랄을 했고 결국 나도 튕겨져 나가 빛이 중간 커뮤니케이션을 맡는 형국이 되었다.


나는 완전히 정줄 놓고  que sera sera 거리며 다녔다.


한 번은 광스터가 모두 모았다.


- 뭐가 문제냐?

- 이게 광고 기획팀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광고 기획이 뭔데?

- 광고를 위한 전반적인 기획 업무입니다. 

- 그러니까 그게 뭔데?

- 구체적으로 업무를 말씀드리면 광고나 마케팅을 진행하기 위해서 시장 및 자사, 경쟁사를 분석하고 파악한 결과를 토대로 전략을 수립하고, 크리에이티브 기획이나 매체 수립이나...

- 야 내가 배운 거랑은 좀 다른데?


분명 지가 못 알아듣는 단어가 나오기 시작했으니 말을 잘랐을 거라고 확신한다.


- 광고 전공자인 내가 배운 건 말이야. 광고를 4년 동안 배운 내가 알고 있는 기획이라는 건, 뭐든지 다 하는 거야.


뭐래는 거야 미친놈이.


응? 나는 뭔가 광고에 대한 진리라도 말해주려나 싶었다. 드디어 이 새끼가 광고 마스터의 진면모라도 보여주는 건가 싶었는데 아쉬웠다. 광고의 대가께서 말씀해주시는 광고 기획의 정의란 그랬다.


- 광고 기획은 다 하는 거야. 무슨 일이든 다 하는 거라고. 상품 구성? 기획전 진행? 너네가 말하는 MD의 영역이라는 거 사실 너네가 다 해야 하는 거라고. 광고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 그럼 PM이시니까 방향이라도 잡아주시면 좋겠습니다. MD 연락처라도 좀.

- 야 너는 PM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그놈의 뭐라고 생각하는데. 이거 얌체공 말버릇인데 아주 고약한 놈이 배워와서 이상하게 쓰고 앉아있다. 대체 하늘다람쥐 팀장은 이딴 놈과 어떻게 같이 일을 했던 걸까. 그것보다 마흔이 넘은 아저씨가 십수 년 전 4년 광고기획 배워서 기획과는 생판 다른 커리어로 일해오다가 이제 와서 광고 전공자 둘을 앉혀놓고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게 너무 우습고 짜증 났다.


언젠가 한 번은 그런 적도 있었다. 클라이언트 회사에 미팅을 다녀오면서 나에게 슬쩍 '우리 과는 광고 전공이라 졸업하면 이런 데 취직했어.' 하며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게 왜 네가 거드름을 피울 일일까. 그리고 '이런 데'라니 야 너랑 나는 뭐가 되냐. '이런 회사를 와서 이렇게 일해야 하는 거야. 야 너도 열심히 일하고 그러면 이런 데에서 일할 수도 있어. 기획 열심히 배우고.' 어이가 없어서 말문을 잃었다. 그럼 너랑 내가 일하는 회사는 '그런'회사냐.


웃긴 건 그 회사도 잡플래닛 평점이 매우 낮더라.


자격지심이 강한 인간. 사실 얌체공도 그렇고 이 회사에 존재하는 대다수의 쓰레기는 생각보다 자존감이 많이 낮은 사람들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광스터는 그런 인간이었다. 친구도 없고 살은 뭐 100m 정도는 걷는 것도 힘들어할 정도로 찌고 말도 잘 못하고 능력도 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게임밖에 없는 인간인데 그런 인간이 좀 직급 높은 자리에 앉았으니 쓰레기가 된 사례구나, 하고 생각했다.


- PM은 프로젝트를 이끌고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게 네가 생각하는 PM의 정의야?


나름 고민한 대답이었다. 할 일이라면 다양하겠지만 간단한 대답으로 정리해서 말해줘야 한다면 뭐.


- 네.

- 그게 네가 생각하는 PM의 정이냐고.

- 그럼 본부장님께서 생각하시는 PM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으나 광스터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정색하고 나를 노려보았다. 회의 같지도 않았던 그 회의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얌체공 때문에 흐지부지 끝이 났다. 나는 어떻게든 그 인간이 생각하는 PM의 정의를 듣고 싶었으나 결국 듣지 못했다. 아주 나중에 '혹시 그놈도 진심으로 몰라서 진짜 물어본 게 아닐까요?' 하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아니면 그냥 시비라도 걸고 싶었든가.


아, 당연한 이야기인데 월급은 계속 밀리는 중이었다. 이때가 두 달째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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