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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고양이 Jul 16. 2019

하늘다람쥐 팀장의 퇴사

유일한 기둥이 사라지다.

밀샤사화를 겪은 기획서는 일단 오케이 되었다. 대체 이딴 걸 쓰기 위해 그딴 고생을 했는가 자괴감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억의 매출을 위해 그냥 온갖 잘 나가는 업체 레퍼런스를 끼워서 이렇게 하면 10억을 벌 수 있습니다. 하고 만들어 놓은 것이라 이전에 만들었던 기획서처럼 아무 신뢰성도, 타당성도 없는 똑같은 쓰레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타깃도, 전략도, 인사이트도, 그 무엇 하나 없는 데이터 낭비.


단순히 얌체공이 손봤단 이유 하나 때문에 통과했다고 느꼈다. 뭐 어찌 되었든 클라이언트가 만족했다면 다행인 거지.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 음 역시 10억이 가능한 거였구나. 그럼 이걸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기획해와.


그만해


뭐야. 역시 가능한 거였다니. 이게 무슨 소리요. 그리고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기획해오라니. 세상에 이런 클라이언트도 있단 말인가. 우리 제품의 강점이라도 알려달라고 했다. 돌아온 대답은 '공장과 협의해서 싸게 팔 수 있다.'였다. 잠깐. 수제간식이라면서.


와 산을 하나 넘었다고 생각했더니 백두대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10억짜리 매출 추이를 만들으니 그럼 이제 그 추이를 실행할 수 있는 기획안을 만들어 오란다. 순서가 좀 잘못된 거 아닌가? 아니 순서 탓이 아니다. 이건 클라이언트의 머릿속에 욕심이 가득해서 생긴 문제임에 틀림없다.


이 미션을 받은 우리 팀은 이날부터 엄청난 고난에 빠지게 된다. 이 미션이 말도 안 된다는 걸 일찌감치 아는지 광스터도 얌체공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딴 것도 못해?'라고 늘 지랄하고 '내가 해주면 너네가 성장을 못한다고.' 라며 도와주지 않았으나 우리는 저 놈들도 답이 없으니까 저 모양으로 회피하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가만히라도 있던가.


하늘다람쥐 팀장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팀장이란 자리에 있으면서 클라이언트에게는 직접적으로 시달리고 위로는 얌체공의 방관과 무시, 질타가 이어졌으며 애초에 그 어떤 실력과 깜냥도 안 되는 광스터의 무능한 개입을 받아내야 했고 아래로는 나와 빛 그 자체가 이 미친 현실에 대해 불평불만을 토로하고 죽어가는 소리만 내고 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본인이 느끼는 책임감의  무게가 상당했으리라.


그래도 강한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해보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활용하고 제안하고 부딪히며 어떻게든 일을 진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개미지옥 같던 미션을 불가능하다고 버리지도 않고 끝까지 물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무능한 광스터는 자신의 실수를 모두 하늘다람쥐에게 뒤집어 씌웠다. 본인이 중간에 실수로 전달하지 못한 사항이나 못 알아들어 전달을 제대로 못한 것들에 대해 '네가 잘못한 거다.'라며 일축하여 뒤집어 씌우기 바빴다. 얌체공은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도 제대로 비추지 않았고 혹여나 회사에 돌아오면 게임이나 하면서 서너 시간씩 하늘다람쥐 팀장을 쥐 잡듯 잡아 혼냈다.


클라이언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뭘 만들어 보내기라도 하면 제대로 된 피드백이 아닌 '아니 이게 아니라...' 하며 지난번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했다. 아직도 이해를 못 했냐며 답답해했다. 모르는 걸 물어보라는데 아는 게 있어야 물어보지. 대체 모르는 걸 어떻게 물어보라는 건지 이해가 하나도 안 되었다. 어쩌다가 얌체공이나 광스터가 같이 회의 들어가면 자기들은 서로 다 이해를 했다고 고갤 끄덕였다. 그러고서 클라이언트가 사라지면 다시 방치.


쓰다 보니 진심 개판이네.


제발 도와달라는 말은 절규에 가까워졌다. 퇴사하고 싶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 점점 마음이 담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이야길 했다.


- 우리 누군가 퇴사하게 되면 뭐 인사 길게 하지 말고 쿨하게 하이파이브나 신나게 한 번 치고 가시죠?


그거 좋은 생각이라며 기운 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 이후 얼마 안 가서 하늘다람쥐 팀장은 퇴사하겠다며 얌체공과 독대했다.


엄청난 고성이 들려왔다. 퇴사하겠다고 말하는 그,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마저 얌체공은 개새끼였다. 유일하게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는데 나가겠다고 하니 붙잡아야 하는 건 당연했을 텐데 그 방법이 너무나도 잘못되었고 과격했고 폭력적이었다.


한참 후 얌체공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먼저 회의실을 나가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 후 한참 있다가 하늘다람쥐 팀장이 나오는 걸 보았다. 누가 보더라도 울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말 아무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 PM은 하늘다람쥐 팀장에서 광스터로 바뀌게 되었다. 퇴사 의사를 밝힌 것도 있지만 클라이언트의 요청도 잇었다고 한다. 사유는 '말귀를 못 알아 들어서.'였다. 아니 그렇다고 이 회사에서 가장 일 잘하는 사람을 버리고 가장 무능한 놈을 PM에 앉히다니.


결정하기 전에 생각했나요?


유일하게 일하고 유일하게 책임감 있고 가장 성실했고 단단했던 사람 하나를 병신으로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날 이후 하늘다람쥐 팀장은 모든 회의와 프로젝트에서 배척되었다. 대놓고 노골적으로 따돌리기 시작했다. 이 작은 회사에서 이게 무슨 꼴이겠느냐만은, 업무 보고나 중간 전달도 절대 하늘다람쥐 팀장을 시키지 않았고 나나 빛 그 자체에게 시켰다. 정말 유치했지만 전달할 말도 직접 하지 않고 우릴 시켰다. 하늘다람쥐 팀장을 빼놓은 카톡방을 만들었고 미팅 일정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하늘다람쥐 팀장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계속 앉아서 모니터만 보았다. 그래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시장 자료를 조사했고 혹시라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판단하는 자료들을 긁어 모아 정리했다. 나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이내 그것들이 그녀만의 퇴사를 준비하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얌체공은 퇴사 일정도 잡아주지 않았고 대표에게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하늘다람쥐 팀장은 직접 대표를 찾아가 퇴사 일정을 조율하고 싶다고 했다. 얌체공은 다시 그녀를 불렀고 사무실 공기를 박살 내는 고성과 욕지거리가 회의실에서 울려 퍼졌다.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다.


사탄도 울고 가겠다.


그래도 하늘다람쥐 팀장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퇴사하기 하루 전 그녀는 나와 빛 그 자체를 회의실로 조용히 불러 A4 한 장씩 나눠주었다. 이 회사에서 그녀가 해온 모든 것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인수인계서였다. 여태까지 봤던 그 어떤 인수인계 보다 깔끔했다.


- 사실 대부분 진행되지 않거나 대기 상태여서 볼만한 건 없을 거예요. 관련 파일 전부 하드채로 공유해 두었으니까 필요하신 건 찾아서 쓰시면 될 거예요.


프로젝트 하나하나마다 어떻게 진행이 되었고 어떻게 끝이 났고 왜 중단되었고 왜 대기 중인지, 담당자와 관계는 어떤지, 담당자는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짚어 설명해주었다. 약간의 미련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정말 가는구나. 당장 팀장의 부재가 어떤 악영향을 미칠 지 걱정되는 마음보다 진심으로 잘 되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결국 퇴사 날짜가 되었다. 우리는 지지부진하게 인사하고 인사하며 소매끝을 잡았다 놓고 잡았다 놓기를 반복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고 내일을 상상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미 전장 속 전우였다.


아쉬운 마음에 회사 밖까지 나와 연신 꾸벅꾸벅하며 따라오는 우리를 보며 하늘다람쥐 팀장이 역으로 가던 발을 멈추고 활짝 웃으며 손바닥을 펼쳐 들고 돌아왔다.


- 자 쿨하게!


그 날 다 같이 하이파이브만 한 열 번 정도 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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