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직속 상사의 마지막 말은 '더워 보이네'였다.
2019년 들어서 월급을 전혀 받지 못했다. 클라이언트는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서 우리를 성실하게도 쪼아댔고 무능하고 무능한 광스터 PM은 여전히 병신 짓거리만 계속해댔다. 우리만 상황이 이런 것은 아니었다. 우리를 제외한 여러 계열사들 역시 월급이 나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모회사가 만들어 놓은 병신 같은 내부 시스템 문제였다.
아, 우리 회사는 유독 힘들었지. 다른 계열사 직원들은 모여서 노무사 대동하고 단체 고소 준비하고, 출근하면 영화나 보든가 했으니까. 아니 애초에 출근도 잘 안 한다고 했다. 월급 밀리는 게 석 달이 넘어가는데 출근이 성실할 필요가 있나?
와중에 언제 돈을 주겠다는 언급도 한 마디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처음에는 언제까지 주겠다고 하다가 점점 언제까지 주겠다고 하더라, 하다가 나중에는 뭐라 말은 하는데 나도 못 믿겠어서 말해주기가 어렵다.로 바뀌었다. 그다음에는 그냥 막연한 기다림이 이어졌다.
초반에는 그냥 출근시간 잘 맞추어 출근하고 퇴근시간 되면 퇴근했다. 클라이언트의 말도 안 되는 사업은 막상 까놓고 오픈하자 이도 저도 아닌 거지꼴이 되었다. 웃긴 게 진행될수록 일은 거지 같아지고 양은 줄어들었다. 이유는 간단하게도, 높으신 양반들이 그렇게 자랑질하고 자신만만하던 것들이 까놓고 보니 별 거 없었던 거다.
자기만 저렴하게 준다던 공장은 알고 보니 모두에게 저렴하게 제공하고 있었고 더 저렴하게 주겠다는 글이 도매상 커뮤니티에 올라오고 있었다. 클라이언트만 그 사실을 몰랐나 보다. MD 인맥 빵빵하다고 큰소리치던 광스터는 정작 인맥이 없어서 우리 보고 고객센터에 진상을 부려서라도 MD 연락처를 따오라고 윽박질렀다. 뭐 한국에서 소셜커머스 좀 한다던 업체랑 일한다고 거드름 피우던데 그마저도 팽당했는지 소식이 없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한 편으로는 고소했는데 다른 한 편으로는 곤욕스러웠다. 온갖 잡무가 우리에게 쏟아졌기 때문이다. 디자인 업무부터 자잘하고 소소한 잡무들, 기획전 기획과 제작, 판매, 판매관리, MD 커뮤니케이션 등등 광고기획팀의 업무 범주를 완전히 넘어서버렸다. 하지만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혼내는 사람도 없었고 혼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완전히 마음대로 회사를 다녔다.
처음에는 지각 좀 했다. 월급도 안 주는 회사에 성실하게 출근하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늦게 일어나고 늦게 나와 커피 한 잔 사서 느긋하게 출근했다.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고 뭐라고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나는 느긋하게 출근했다. 일종의 임금 체불에 대한 항의 표시였지만 내심 궁금한 마음도 있었다. 어디까지 불성실하면 대화를 시작할까.
내 직속 상사였던 얌체공은 월급이 두 달째 밀리던 달부터 대표이사실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인수 계획을 세우는 중이라고는 하는데 이 적자 회사를 인수해 줄 회사가 있고, 거기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게 너무 우스웠다. 그게 밀린 월급을 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가 아마 노무사 소개해줄 사람을 찾아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와중에 광스터의 눈치 없는 행보와 얌체공의 뻔뻔함에 대해 잠깐 썰을 풀어보자. 뭐 두말할 것 없이 광스터는 급여가 밀려서 당장 핸드폰 요금 걱정하는 직원들에게 자기 신발 100만 원 가까이하는 거 디자인 좀 골라달라고 자랑하면서 돌아다녔고, 얌체공과 대표, 대표 와이프는 어디 놀러 가서 회 먹으면서 자기들끼리 직원들에게 죄송하다며 서로 사죄하고 용서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말을 아무렇게나 했다. 대체 뭐가 문제인건지도 모르겠다.
뭐 아무튼 그렇게 있는 와중에 얌체공이 대표이사실을 뛰쳐나와 춤을 추며 돌아다녔다. 인수가 될 것 같다는, 그것도 어느 대기업의 자회사에 인수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와 재수가 없긴 해도 능력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역시 공감능력은 없는 모양이었다. 온 계열사를 돌아다니며 초상집 같은 분위기 속에서 춤을 추며 자랑질을 해대는 거 보면. 그러면서 인수될 때까지 입을 무겁게 하라는 걸 보니 이 양반은 스탯을 이상한데 몰아서 찍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인수가 잘 되었냐고?
어림없는 소리.
애초에 잘 될리 없는 인수였다. 세상에. 이유를 재차 묻고 물어서 들어본 변명도 개판이었고, '긍정적으로 검토해준다고 해서 믿었는데...' 하고 말꼬리를 흐리는 대표의 말을 들어봐도 그렇고 정말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설레발을 친 건지 전혀 이해가 안되었다. 월급 밀려서 울상인 직원들 면전에서 그렇게 골반 흔들면서 노래불렀다며. 정신나간 인간 같으니라고.
김칫국 마시며 간만에 거만 모드로 돌아서서 내 옷차림을 보며 더워 보이네 하고 빙글빙글 웃고 다른 직원들에게 뭔가 여유를 갖췄다는 듯이 농담을 던지던 그의 활기는 며칠 못 갔다. 그는 다시 대표이사실에 처박혀 기침을 해댔고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가 그만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그 뒤 얼마 안 가서였다.
- 이상하네요. 이번달까지랬는데.
소문에 의하면 그만두기 하루 전날이었다.
- 어떤 식으로 우리한테 인사를 할까요?
- 사과라도 하려나요?
나와 빛 그 자체 매니저는 그의 마지막 인사가 어떤 말일지 참 궁금해했다. 정말
같이 지랄하며 우리를 죽일 듯이 쪼아대던 그였기에, 우리 팀장을 인간 이하로 하대하며 쥐 잡듯이 잡던 그였기에 그의 마지막 말에 어떤 사과 비슷한 거나 후회 비슷한 게 담겨있지 않을까 하고 내심 기대했다. 오늘은 말을 걸지 않을까? 밥이라도 같이 먹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데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대표이사실에서 나온 얌체공이 우리 주변에 와서 뭔가 사춘기 소년이 고백하려는 듯이 쭈뼜쭈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 드디어? 하고 기대하는데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돌아서서 회사 밖으로 나가버렸다. 뭐지? 내일 인사하려나? 하다가 다음날, 여지없이 늦게 출근해서 빈둥빈둥거리고 있는데 노트북을 옆에 끼고 빠른 종종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가는 얌체공의 모습이 옆을 스쳤다. 점심도 안 먹고 미팅을 가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성격이 파탄나버린 인간이 인간관계를 마무리짓는 모습은 도망으로 끝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제 내 직속 상사는 대표가 되었다.
임금 체불이 석 달 째로 접어들었을 무렵, 나는 이대로 계속 기다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