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모여봅시다.
월급이 밀리면 맨 처음 무엇을 해야 할까? 언제쯤 행동하는 게 적기일까? 어떻게 협상을 해야 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회사 사정마다, 상사나 대표가 어떻냐에 따라 다양한 방법과 상황이 있겠지만 일단 우리 회사의 상황은 매우 매우 매우 매우 안 좋았다. 노무사도 이런 케이스는 보기 드물어서 손대기 꺼려진다고 말했었으니까.
임금체불이 두 달을 넘어서 세 달 때에 접어들던 때, 더 이상 밀리면 안 된다는 던 알고 있었다. 물론 한 달만 밀려도 안 되는 거지만 세 달을 넘어가게 되면 그 이후의 월급에 대해선 받을 길이 전혀 없어진다. 세 달치 월급은 체당금 제도로 회사가 지불 능력 없이 도산하게 되면 국가에서 대신 지급해주는 방법이 있지만 나머지는 회사에 지급 능력이 없다 하면 받을 수가 없어진다.
하지만 체당금에도 문제는 존재한다. 회사가 도산해야 한다는 것. 일단 이 회사가 계속 굴러갈 수 있을지에 대해 알아봐야 하고 대표가 무슨 법리적인 장난질을 치고 있지는 않은지 알아봐야 하는 게 급선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른 직원들에게 연락을 돌렸고 최대한 정보를 끌어모아 보기로 했다.
며칠 동안의 정보수집과 연락을 통해 함께 움직일 매니저들을 모으는 데에 성공했고 회사의 사정에 대해 파악이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팀장 이하 수준에서 알 수 있는 정보는 극히 미비했지만 각자가 알고 있는 파편적인 정보들이 꽤 도움되었다. 특히 경영지원 쪽 직원 한 명이 가세하면서 정보가 매우 알차게 되었다. 여기서 알게 된 사실을 요약하면 대충 이러하다.
- 우리 회사의 지분은 모회사와 대표이사가 나눠가지고 있다.
- 우리 회사의 모든 자금은 모회사가 계좌를 틀어쥐고 있으며 집행도 직접 한다. (사실상 체불의 제1원인)
- 우리 회사에 들어오는 모든 자금은 모회사에서 지급되었으며 지출된 모든 금액의 대부분이 적자이다.
- 모회사의 자금으로 인수한 B회사가 있으며, 회사의 인력을 활용하여 B 회사의 영업 및 매출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 B 회사의 지분은 우리 회사의 대표가 최대주주로 모회사와 지분을 나눠가지고 있었다.
- 심지어 대표가 회사를 설립하기 전 가지고 있었던 사업체 C 회사의 이름으로 영업을 하고 있었고 인력 일부를 C 회사의 이름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와 말만 들어도 복잡하다. 이딴 구조를 만들어두고 영리 활동을 하고 있으니. 이렇게 되면 적자인 재무제표를 들고 가서 사실상 도산으로 처리하기도 힘들어진다. 법인은 지분구조와 상관없이 독립하여 존재하지만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인력으로 사업을 영위했을 때 상법상 동일한 회사로 판단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즉 세 회사 다 도산해야 체당금 지급 요건이 된다.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몇몇 직원들은 월급을 조금이라도 주겠다는 명목으로 B회사로 재계약을 시켜버린 경우도 있었다. 사건이 점점 복잡해진다.
이 상태로 노무사를 찾아갔다. 월별로 급여가 체불된 직원들 수와 총액, 우리 회사의 재무 상태 등을 가지고 갔다. 노무사는 똑같은 이야기를 하며 이런 경우에는 방법이 별로 없다고 했다. 단체로 고소하고 사건을 키워서 취하서를 들고 대표에게 도산을 요구하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몇 가지 팁을 주었다.
- 만으로 나이가 서른을 넘지 않았을 경우 체당금에도 받을 수 있는 월별 상한액이 있다.
- 이런 경우 만약 급여를 받게 된다면 상한액 외에 체당금으로 받을 수 없는 만큼만 받는 게 좋다.
- B회사로 이직한 직원들은 빨리 퇴사하는 게 답일 수도 있다.
- 직전 3개월치 월급만 체당금 대상이 되기 때문에 동일 회사로 간주하게 되면 급여를 받은 달이 최근이 될수록 멀어지는 달의 급여를 받을 수 없게 된다.
- 가능하다면 대표를 데려와라. 이런 경우에는 급여를 지급한다 해도 잘 줘야 한다.
단체로 고소라도 해야겠구나 하고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회사에 돌아오니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임원급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와 함께 경영지원 팀장 하나가 자꾸 회사 사무실 인테리어 전화를 하면서 이상한 회사 이름을 부른다는 이야기였다.
와중에 광스터가 계속 안절부절못하면서 회계를 맡고 있는 팀장과 입사한 지 얼마 안 되는 본부장을 계속 부르고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광스터는 정말 단순한 사람이어서 얌체공이 탈주한 이후로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돌아다니며 말실수나 저지르고 다니던 중이었는데 나와 빛 그 자체 매니저에게는 아주 좋은 먹잇감 대상이었다. 말 잘못하면 그냥 들이받고 대들면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 일품이었는데 몇 번 그래 놓으니 회사 생활이 아주 편해졌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 우리 저 인간 한 번 떠볼까요?
빛 그 자체 매니저는 나와 밀린 월급 받아내기 프로젝트의 주축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는데 광스터의 부름으로 임원들이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서 무슨 꿍꿍이인지 알고 대처해야겠다고 생각을 모았다. 이 술렁이는 판에서 자칫 잘못하면 완전히 나가리 될지도 모르겠고 광스터는 가장 만만한 인간이었으니까.
- 저 인간 불러다가 쪼아볼까요?
- 아는 게 뭐 있겠어요. 아무것도 못 건질 것 같은데.
- 그러면...
우리는 그나마 좀 똘망똘망해 보이는 신입 본부장을 불러보기로 했다.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몰래 일을 벌이는 중이라면 안절부절못할 거고, 별 일 아니라면 그냥 평소 하던 대로 자기 자리에서 게임이나 하고 있을 터다. 우리는 조용히 조직도에서 본부장의 연락처를 찾아 회의실로 불렀다.
막상 회의실에 들어가니 무슨 말을 할지 순간 막막했다. 그래도 임원인데 사측 사람이 아닐까? 괜히 움직이고 있다는 거 들통나면 걸림돌이 되는 거 아닌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 저희 단체로 움직이려고 모여있습니다. 아무래도 임원이 대표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뵙자 했습니다.
반응을 살짝 살펴보니 뭔가 알겠다는 표정이다. 쐐기를 박는 게 좋겠다 생각했다.
- 고소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