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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고양이 Jul 03. 2019

웰컴 투 광고대행사

이놈은 정말 미친놈이구나 싶었다

RFP (Request for proposal), 그러니까 제안 요청서를 받았다. 꽤 규모 있는 국내 기업의 건이었고 이는 내가 이 회사의 기획팀에 들어와서 처음 준비하는 PT가 되었다. 뭔가 불안하긴 했는데 얌체공 이사는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어차피 하기로 한 건데 보여주기 식이라도 제대로 해야 하니까 잘 만들어 보라고 했다.


요지는 이렇다. 그 기업의 브랜딩 전반을 맡고 있는 대행사가 있었다. 이 대행사의 대표와 얌체공 이사가 어떻게든 친해진 것 같았다. 그러면서 이번에 온라인 마케팅을 진행할 건데 기존 업체를 바꿀 때가 된 것 같아서 새 업체를 찾기 위해 PT를 진행한다며 우리 회사를 밀어주기로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클라이언트는 모르는 상태로.


우리는 병 같은 위치였던 거지.


쉽게 말하면 비밀리에 대대행을 맡게 되었다는 건데 그 브랜딩 대행사 명함을 파서 대행사 이름으로 참여하는 거라 안 될 일 없다는 얌체공 이사의 자신감이었다. 약간 갸웃 하기는 했지만 뭐 어쨌든 돈이 들어온다는데 해야지 입사한 지 반년이 넘어가는 동안 돈 버는 모습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기획서 작업은 의외로 순조로웠다. 정말 이렇게 순탄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난하게 흘러갔다. 물론 하늘다람쥐 팀장의 엄청난 불안과 야근이 동반되었었지만 얌체공이나 기타 다른 누군가에게 까인 적 한 번도 없이 정말 무난하게 흘러갔다. 뭐 대행사 대표가 기획서를 보더니 아주 흡족해했다고 하는데 그런 기획서를 깔 명분이 없었던 모양이지.


솔직히 나는 전체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기획서였지만 결재 라인이 전부 오케이 한 걸 내 고집으로 뜯어고치겠다고 나서기엔 너무 말단이었고 이 회사에 그 정도 애정도 없었거니와 굳이 찾아온 이 평화를 해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그때부터 그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불안함의 덩어리가 문장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 아무리 있어봐야 더 이상의 성장과 배움은 없겠구나. 하는.


답도 없지!


하늘다람쥐 팀장은 매번 야근할 때마다 이걸로 안 된다며 자기가 여태 봐왔던 기획서 중 최악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나는 임원들이 다 오케이하고 대행사 사장도 괜찮다는데 조금 마음 놓으시고 믿어보시어라. 하고 말했지만 언제든 얌체공 이사가 소리 지르며 깔 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압박을 쉽게 지우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불안은 막연했고 구체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지적이었다. 어디가 그렇게 잘못되었냐고 물으면 다른 말은 못 하고 그저 왜 이렇게 불안하지? 하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막연한 불안은 나와 빛 그 자체 매니저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로 변해 돌아왔다. 하늘다람쥐 팀장은 기획서를 수십수백 번씩 돌려보며 의미 없을 것 같은 미세한 수정을 했다가 돌아왔다가 다시 했다가 하는 짓을 계속해서 반복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야근을 불러왔다. 새벽이 넘어서도 계속하며 원래 RFP 받으면 밤새는 거라며 야근을 당연시했다.


난 심지어 크리스마스에도 일을 해야 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이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방향을 정하면 그걸 밀어붙이고 발전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가 많아 야근을 하는 게 아니라 야근을 해야 해서 야근을 하는 기분으로 발전되는 방향 없이 새벽 퇴근이 반복되었다. 사실 실무 세 명 밖에 없는 회사가 뭘 더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뭔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말단 직원은 잘못이 보여도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 침묵하게 되었고, 중간 관리자는 지나치게 몰아붙여진 탓에 좁아진 시야와 막연한 불안감으로 이끌지도, 이끌려 가지도 않고 제 앞의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었고, 관리자는 기분 따라 지랄과 방관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뭐 이건 담금질도 아니고.


체력은 자신 있었다. 밤새 앉아 고민하는 부분들을 물어보고 생각을 말해주고 수정하고. 그렇게 며칠 새벽 퇴근을 하고 디자인까지 어느 정도 잡아놓고 나서야 안정감을 찾아가는 듯 싶었다. 하지만 얌체공 이사가 하늘다람쥐 팀장에게 PT를 시키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불안은 이전과 비교도 안 될만큼 커졌으며, 기획서는 더욱 좁고 무의미한 수정의 늪에 빠지기 시작했다.


- 야 걱정하지마 PT장에서 뺨을 때리지 않는 이상 안 져.


얌체공 이사는 엄청나게 확신했다. 그도 그럴게 대행사에서는 이미 브랜딩 대행 중이었고, 그 회사 이름으로 참여하는 것 외에도 기업 내부 정보를 전부 공유받고 있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사실상 내정이었다. 시장 조사, 기업 조사 같은 건 이미 다 되어있었고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아이디어와 실행방안의 짜임새 정도였다. 그러나 야근은 계속되었고 결국 제출 하루 전날, 회사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얌체공 이사는 아침에 자다 일어난 우리 팀을 보며 웃었고 엄청나게 느끼한 포즈와 표정으로 '웰컴 투 광고 대행사'라고 했다. 속사정도, 생각도 모르고 이놈은 그냥 미친놈이구나 생각했다. 얌체공 이사는 PT 때문에 걱정하며 연습하고 있는 하늘다람쥐를 보며 싱글벙글 놀리듯이 자신 있냐고 야금야금 물어봤는데 어차피 지가 할 거면서 그냥 어린 부하직원 놀리는 모습으로 밖에 안 보였다. 실제로 자기가 하기도 했고.


진짜 이런 표정으로 웰컴 투 광고 대행사라고 했다. 물론 이렇게 잘 생기지 않았다.


뭐 아무튼 그렇게 마무리되나 싶었다.

아! 물론 PT는 졌다.


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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