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놈은 정말 미친놈이구나 싶었다
RFP (Request for proposal), 그러니까 제안 요청서를 받았다. 꽤 규모 있는 국내 기업의 건이었고 이는 내가 이 회사의 기획팀에 들어와서 처음 준비하는 PT가 되었다. 뭔가 불안하긴 했는데 얌체공 이사는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어차피 하기로 한 건데 보여주기 식이라도 제대로 해야 하니까 잘 만들어 보라고 했다.
요지는 이렇다. 그 기업의 브랜딩 전반을 맡고 있는 대행사가 있었다. 이 대행사의 대표와 얌체공 이사가 어떻게든 친해진 것 같았다. 그러면서 이번에 온라인 마케팅을 진행할 건데 기존 업체를 바꿀 때가 된 것 같아서 새 업체를 찾기 위해 PT를 진행한다며 우리 회사를 밀어주기로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클라이언트는 모르는 상태로.
쉽게 말하면 비밀리에 대대행을 맡게 되었다는 건데 그 브랜딩 대행사 명함을 파서 대행사 이름으로 참여하는 거라 안 될 일 없다는 얌체공 이사의 자신감이었다. 약간 갸웃 하기는 했지만 뭐 어쨌든 돈이 들어온다는데 해야지 입사한 지 반년이 넘어가는 동안 돈 버는 모습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기획서 작업은 의외로 순조로웠다. 정말 이렇게 순탄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난하게 흘러갔다. 물론 하늘다람쥐 팀장의 엄청난 불안과 야근이 동반되었었지만 얌체공이나 기타 다른 누군가에게 까인 적 한 번도 없이 정말 무난하게 흘러갔다. 뭐 대행사 대표가 기획서를 보더니 아주 흡족해했다고 하는데 그런 기획서를 깔 명분이 없었던 모양이지.
솔직히 나는 전체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기획서였지만 결재 라인이 전부 오케이 한 걸 내 고집으로 뜯어고치겠다고 나서기엔 너무 말단이었고 이 회사에 그 정도 애정도 없었거니와 굳이 찾아온 이 평화를 해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그때부터 그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불안함의 덩어리가 문장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 아무리 있어봐야 더 이상의 성장과 배움은 없겠구나. 하는.
하늘다람쥐 팀장은 매번 야근할 때마다 이걸로 안 된다며 자기가 여태 봐왔던 기획서 중 최악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나는 임원들이 다 오케이하고 대행사 사장도 괜찮다는데 조금 마음 놓으시고 믿어보시어라. 하고 말했지만 언제든 얌체공 이사가 소리 지르며 깔 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압박을 쉽게 지우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불안은 막연했고 구체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지적이었다. 어디가 그렇게 잘못되었냐고 물으면 다른 말은 못 하고 그저 왜 이렇게 불안하지? 하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막연한 불안은 나와 빛 그 자체 매니저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로 변해 돌아왔다. 하늘다람쥐 팀장은 기획서를 수십수백 번씩 돌려보며 의미 없을 것 같은 미세한 수정을 했다가 돌아왔다가 다시 했다가 하는 짓을 계속해서 반복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야근을 불러왔다. 새벽이 넘어서도 계속하며 원래 RFP 받으면 밤새는 거라며 야근을 당연시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이렇게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방향을 정하면 그걸 밀어붙이고 발전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가 많아 야근을 하는 게 아니라 야근을 해야 해서 야근을 하는 기분으로 발전되는 방향 없이 새벽 퇴근이 반복되었다. 사실 실무 세 명 밖에 없는 회사가 뭘 더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뭔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말단 직원은 잘못이 보여도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 침묵하게 되었고, 중간 관리자는 지나치게 몰아붙여진 탓에 좁아진 시야와 막연한 불안감으로 이끌지도, 이끌려 가지도 않고 제 앞의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었고, 관리자는 기분 따라 지랄과 방관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체력은 자신 있었다. 밤새 앉아 고민하는 부분들을 물어보고 생각을 말해주고 수정하고. 그렇게 며칠 새벽 퇴근을 하고 디자인까지 어느 정도 잡아놓고 나서야 안정감을 찾아가는 듯 싶었다. 하지만 얌체공 이사가 하늘다람쥐 팀장에게 PT를 시키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불안은 이전과 비교도 안 될만큼 커졌으며, 기획서는 더욱 좁고 무의미한 수정의 늪에 빠지기 시작했다.
- 야 걱정하지마 PT장에서 뺨을 때리지 않는 이상 안 져.
얌체공 이사는 엄청나게 확신했다. 그도 그럴게 대행사에서는 이미 브랜딩 대행 중이었고, 그 회사 이름으로 참여하는 것 외에도 기업 내부 정보를 전부 공유받고 있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사실상 내정이었다. 시장 조사, 기업 조사 같은 건 이미 다 되어있었고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아이디어와 실행방안의 짜임새 정도였다. 그러나 야근은 계속되었고 결국 제출 하루 전날, 회사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얌체공 이사는 아침에 자다 일어난 우리 팀을 보며 웃었고 엄청나게 느끼한 포즈와 표정으로 '웰컴 투 광고 대행사'라고 했다. 속사정도, 생각도 모르고 이놈은 그냥 미친놈이구나 생각했다. 얌체공 이사는 PT 때문에 걱정하며 연습하고 있는 하늘다람쥐를 보며 싱글벙글 놀리듯이 자신 있냐고 야금야금 물어봤는데 어차피 지가 할 거면서 그냥 어린 부하직원 놀리는 모습으로 밖에 안 보였다. 실제로 자기가 하기도 했고.
뭐 아무튼 그렇게 마무리되나 싶었다.
아! 물론 PT는 졌다.
병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