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뜻밖의 참외

by 이승준

농원 근처를 빙 돌아보다 보니 뒤편 공터에 야구 공보다 조금 크게 파란 참외가 열려있다.


심은 적 없는 참외인데 고라니가 씨라도 옮겨놓고 갔나 하는데 아버지가 보시더니 뭐가 그리 즐거우신지 크게 웃으신다. 지난여름, 아버지가 참외를 드시다가 씨를 발라내어 풀밭에 버렸는데 그게 뿌리를 내렸나 보다 하시면서 아주 신기해하셨다.


이후로 나는 매일 기웃거리며 참외가 익는 걸 확인했다. 언제 노랗게 되나 하고 아직은 애호박처럼 시퍼런 참외를 만지작 거리다가 놓아주었다. 꼭 참외처럼 생겼는데 색은 진하게 초록색이고 솜털이 꼭 송충이처럼 온 표면에 붙어있어서 까슬까슬했다. 이게 다 익으면 내가 아는 그 참외가 된다고? 했다. 혹은 참외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더위가 가시기 전, 꽤 찌는 날씨에 본 참외는 꽤 노란색이 많이 보였다. 이쯤이면 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침만 흘리며 고개를 빼꼼 빼꼼 빼놓고 보다가 다음날 비가 온다는 이야길 들었다. 비가 오면 참외는 어떻게 되냐고 여쭤보니 엄마는 참외가 썩지 않을까? 하셨다. 다음날 농원에 나오자마자 아버지께 하나만 먹어보자며 졸라댔다.


성급했다.


아무리 껍질을 깎아도 초록색 부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깎을 때마다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과즙은 참외의 달달한 향내가 아니라 매우 텁텁한 흙향만 가득했다. 이걸 다 걷어낼 정도로 깎아내면 속은 엄청나게 단 과육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참외가 반 정도까지 얇아졌을 무렵, 나는 한 입 베어 물고 아주 크게 실망했다.


나는 오이를 싫어한다. 그래 이건 오이보다 맛이 없었다. 과육은 단단하고 어릴 때 운동장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맛을 보게 되었던 흙의 맛과 왜 기억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남아있는 풀 맛이 한데 어우러진 맛이었다. 나는 오래 씹으면 달지 않을까 하고 곰곰이 씹어보았지만 결국 뱉어 버렸다. 단 참외는 따로 어디서 만드는가 보다 하고 그렇게 참외를 포기했다.


그렇게 여름 다 갈 때까지 나는 참외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 뭐 비 맞다 보면 썩어서 거름이나 되겠지, 다음 해에는 맛있는 참외가 열리려나. 하고 그저 내 할 일 하고 무시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오산이었다. 이 추운 날씨에 얼핏 본 뒷마당에는 샛노란 참외들이 우람한 자태를 뽐내며 흙바닥 위에 여기저기 누워있었다.


와, 솜털의 흔적도 초록색의 흔적도 별로 찾아보기 어려운 그 노란 참외는 누가 봐도 시장에서 팔만한 상등품이었다. 바로 하나 따서 깎아먹어 보았다. 세상에, 달아. 달기와 부드러움이 거의 멜론 정도 수준이다. 두 개를 깎아 아버지와 허겁지겁 나누어먹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처음 씨를 뿌리고 수확해서 먹는 첫 번째 과일이다.


세상에, 너무 달아서 무시하고 지냈던 지난날을 참외에게 사과해야 했다. 내년엔 더 많이 열리겠지? 이참에 뒷마당을 참외밭으로 만들어버릴까 하는 즐거운 상상도 해보면서 먹던 참외의 씨앗을 조금 떨어진 곳에 몰래 또 버렸다. 내년에도 많이 열려서 의도치 않은 텃밭이라도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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