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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고양이 Oct 31. 2019

축하합니다. 승소하셨습니다.

자 이제 진짜 끝내자.

법률구조공단에서는 은행에 들고 가라며 서류 몇 장을 주었다. 은행 직원은 계좌를 조회해서 남은 돈이 있다면 내일 중으로 입금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있을 리가 없지, 국세도 밀려서 지금 완전히 회사가 멈춰있다는데. 문제는 모기업의 투자구조가 복잡해서 모든 계열사가 죽지 못하는 기업이 되었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상황인데도 압류를 걸겠냐는 말에 나는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다고, 걸어달라고 부탁드렸다.


사실상 완결이다.


이자는 점점 불어날 것이다. 거의 법정 최고금리에 가까운 이자율은 아마도 지급하지 못하는 동안 계속해서 불어날 것이다. 퇴사당한 직원들끼리 모여서 이자 채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우리 부자가 된 것 같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돈이 불어난다며 받지도 못할 돈의 액수만 세어본다. 이렇게 된 거 비정기 채권자 집회라도 열어서 쌓여가는 부를 느껴보자고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했다.


거의 뭐 이런 기분.


시간이 꽤 흘렀다.


대표에게는 이제 연락이 없다. 광스터는 임원 중에 유일하게 고소를 안 한 사람인데 나에게 전화해서 고소했던 사람들만 취하해주는 조건으로 돈을 줬다고 대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이 등신 같은 인간은 아주 작은 사소한 하나도 자기 혼자 결정 못해서 나나 다른 직원들한테 치근덕거리며 귀찮게 물어볼 때는 언제고 이런 건 또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혼자 고소를 안 했는지. 그리고 이놈은 회사가 망해가는 걸 알고 연말정산도 안 뱉어낸 놈이다. 양심도 없나 보다. 한 소리 했더니 바로 쭈그러들었다. 으휴 등신 으휴.


얌체공은 그렇게 도망간 이후로 소식을 모르겠다. 다만 그가 애용하던 카쉐어링 브랜드가 눈에 띌 때마다 짜증이 나 죽겠다. 내 멘탈과 자존감에 가장 인상 깊은 타격을 가져다준 놈인데 마지막 인사 한 번 깔끔하게 안 해놓고 마무리한 게 정말 두고두고 열 받을 것 같아서 짜증 난다. 이제 이놈한테 짜증이 나는 걸 보아하니 나도 꽤 회복이 되었나 보다.


이놈 집 앞에 있는 노가리 맛집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 자 이걸 보고 있고 자기가 얌체공인 것 같아서 찔리는 거 같으면 그대로 조용히 아무 소식 전하지 말고 잘 숨어 지내라. 네가 나 서울 뜨고 고향 내려간다고 동네방네 다 소문내고 다녀서 어떤 클라이언트는 아빠품으로 돌아가는 거냐고 비아냥 거리더라. 답 없는 공감능력 부재중인 인간아. 너랑 퇴사 상담할 때 내가 진짜 진심으로 말하고 너도 진지하게 받아줬잖아. 어떻게 너는 마지막까지 병신같이 구냐 진짜.


근데 이건 진짜 맛있더라. 인정.


그냥 영원히 소식 전하지 말고 그렇게 혼자 외롭고 고독하게 지내다가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곳에서 홀로 늙어가길 바라. 넌 갱생도 안 될 거야.


빛 그 자체 매니저는 퇴사 이후에도 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참에 이렇게 된 김에 인터뷰를 시도해보았다. 바쁜 분이시지만 카톡으로 어렵게 모셨다.





Q. 안녕하세요 빛 그 자체 매니저님.

A. 네(라고 대답하긴 하지만 명칭을 납득할 수 없다.)


Q. 요즘엔 어떻게 지내시나요?

A. '그' 회사의 그림자 때문에 한동안 구직의사를 잃고 있다가 실업급여를 받으며 실업인정을 받기 위해 억지로 구직을 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지금은 구직의사는 참 트루입니다. 그래서 지금 열심히 구직하고 있습죠.


Q. 뭐 회사가 어떤지는 그동안 제가 열심히 써보았습니다만 제가 놓친 거지 같았던 단점들이 혹시 더 있을까요?

A. 개인적이지만 저는 경비 인원을 아주 뭣 같이 여겼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지나다니고 자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복도 자리였는 데다가 냉난방이 열악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잠시 돈이 나온다는 희망만 떠돌 때 직원 뽑은 거. 그리고 뭔 놈의 부의장 본부장이 많아. 본부 없는 본부장, 팀원 없는 팀장 수두룩


우리 본부에는 매니저가 한 명, 그 위에 선임이 세 명 팀장이 네 명. 이게 회사냐 진짜.


Q. 아 맞아요. 직원보다 임원이 더 많았어 심지어. 왜 그렇지?

A. 이 회사 시작이 어느  대학의 창업지원센터라는 얘길 들었는데 그때 만난 동문끼리 임원 나눠 먹은 거 아닐까요? (아아 그렇구나 그래서 그렇게 끈끈한...)

그리고 의장 예비 와이프는 하는 거 없는데 요직, 통장관리.


Q. 저는 입사할 때 진짜 절차도 없이 면접 본 지 한 달 거의 다 되어갈 때 협상한 적도 없는 연봉 이야기하면서 몇 달을 앉아만 있었거든요. 빛 매니저님은 저보다 입사가 며칠인가 빨랐던 거 같은데 혹시 입사 과정에서 저같이 어이없거나 황당했던 일, 입사하고 나서 거지 같았던 일 같은 게 있을까요?

A. 맞습니다. 저는 면접 볼 때 연봉을 꽤 낮게 협의했어요. 6월 입사여서 6개월 일해보고 서로 맞으면 내년에 제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조건이었거든요. 근데  그 내년은 망했기에 그렇게 끝이 났고요.


Q. 아아 그 내년이 그 체불이 시작되던?

A. 네네, 새해가 됐는데도 협상할 생각도 여유도 의지도 없었죠. 시벌놈들.


쌍욕을 트럭으로 싣고 와서 가져다 부어도 모자란 놈들.


Q. 회사가 본인에게 미친 영향이랄 게 있을까요? 그런 뭣 같은 점들이?  저에게는 다시는 조직생활을 못할 것 같다는 확신을 가져다주었는데.

A. 저도 회의감과 허탈감, 불안감이 늘었지만 무언가 더 자신감이 생겼달까요?

그리고 세상에 학벌과 재산, 권력이나 지위가 다가 아니라는 생각은 했지만 진짜 뭣 같은 놈들 많다는 생각을 했고 그놈들의 생각을 나 따위가 바꿀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동시에 스타트업 트라우마가 생겼지요. (아 맞아요 스타트업 트라우마. 그거 진짜 심하게 생겼어요.)

업력 10년 이하는 무조건 거릅니다.


Q. 그래도 빛 매니저님은 긍정적인 생각도 생겨서 좋군요. 월급이 밀릴 때는 왜 그만두지 못하셨나요? 

A. 일단 멀어지면 더 불안했으니까요. 적은 더 가까이 두라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직이 확정될 때까지 더 다녀도 손해 볼 게 없었고. 무엇보다 같이 노는 게 재미났어요. ㅋㅋㅋ


심지어 막판에 우리는 출근해서 화투도 쳤다.


Q. 아하 ㅋㅋㅋ 맞아요. 느지막이 출근해서 업무 안 하고 놀고 ㅋㅋㅋㅋ

A. 맞아요 그겁니당ㅋㅋㅋㅋㅋ존잼ㅋㅋㅋㅋㅋㅋ저도 아주 즐거웠습니다 ㅋㅋㅋㅋ 꿀잼이었지요


Q. 아 그러면 지금도 어딘가에선 월급이 밀려가며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요. 그런 사람들에게 해주실 수 있는 말씀이 있을까요?

A. 생각보다 세상은 나쁜 놈이 많지만 생각보다 국가는 우리를 보호해준다

이 말은 많지 않은 월급 따박따박 들어오길 기다리는 수많은 '그저 사원'인 분들에게 바칩니다




아 이제 정말 끝이겠지. '그' 회사는 아마 내 고용보험 가입 이력과 내 이력서에 몇 줄 정도로 문서상에도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것 말고도 내 기억과 마음에 영원히 잊지 못할 상처도 함께 남겨놓았을 것이다. 뭐 어쩌지 못할 커다란 존재와 싸움을 마악 끝낸 기분이 든다. 이상한 나라로 갔던 급행열차는 나를 밀어내고 이제 나도 모르는 더 먼 곳으로 떠나가버렸다.


지나고 보니 우습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땐 그게 뭐라고 그렇게 진지했을까. 정말로 본부장이나 이사가 죽일 듯이 욕을 하면 뭐가 잘못될 것 같아서 겁을 먹었을까. 그게 뭐라고 나는 그렇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혼나지 않기 위해 뛰어다녔을까. 그게 뭐라고 월급도 안 주는데 붙잡혀서 발이 매여있었을까. 그게 뭐라고 내가 나답지 않아질 정도로 나를 잃어버리도록 내버려 두게 했을까.


에라이 이거나 먹어라.


그게 뭐라고. 등신 같은 회사 따위가. 사람들 따위가.

감히 소중한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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